‘사랑의 기술’을 읽고

#사랑의정의

1. 사랑은 주관적이다

사랑. 국어사전은 사랑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몹시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일.’ 졸라 모호하다. ‘몹시’는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것이며,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건 또 뭐란 말인가. 게다가 ‘마음’이랑 ‘일’은 따지고 보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어쩔 수 없다. 사랑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단어다. 사랑은 ‘감정’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술이 아주 발달한다면 또 모르겠다. ‘사랑은 호르몬a와 호르몬f의 작용으로 뇌세포453이 70% 이상 활성화되는 것’ 같은 식으로. 어쨌든 적어도 현재로선, 사랑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정의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물론 지나치게 자의적이면 아무한테도 공감을 못 얻겠지만.

2. 내가 정의하는 사랑이란

사랑을 ‘나로 인해 상대방의 삶이 더 좋아졌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뉘앙스와는 살짝 거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정의하는 사랑에는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게 ‘함께하고 싶은 마음’은, 사랑이라기보단 욕구다. 나쁘다는 게 아니다. 그저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자기중심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나는 사랑이 조금은 이타적인 개념이었으면 좋겠다. 물론 계속 따지고 들면서 결국 모든 건 자기 자신을 위한 거 아니냐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아무튼 그래서 나는 몇 년을 나름 열심히 고민한 끝에, 사랑을 위에서 말한 것처럼 정의하기로 했다. 조금씩 바뀌어 나갈 수는 있겠지만.


#성숙한사랑의조건

1. 좋은 걸 좋다고 여길 수 있어야 한다

위에서 말했듯,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나로 인해 상대방의 삶이 더 좋아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런데 ‘좋다’라는 말도 따지고 보면 참 애매한 말이다. 도대체 좋은 게 뭘까. 나는 바나나를 좋아하는데 쟤는 바나나를 싫어하면 바나나는 좋은 걸까, 아니면 나쁜 걸까. 좋다는 건 참 상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좋은 삶’이라는 게 어느 정도는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단지 그 스펙트럼이 꽤 넓을 뿐이다. 예를 들어, 적어도 먹고 살기 힘든 것보단 먹고 살만한 삶이 더 좋은 삶이다. 그리고 지적인 삶일수록, 아름다운 것을 많이 느끼는 삶일수록, 이웃과 함께하는 삶일수록 좋은 삶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러니까 성숙한 사랑의 첫번째 조건은, ‘좋은 걸 좋다고 여길 것’이다. 적어도 구린 걸 좋다고 생각하지만 않아도 다행이긴 하겠다. 끊임없이 내가 좋다고 믿는 게 진짜로 좋은 건지에 대해 의심하는 것은 필수.

2. 실제로 상대방의 삶을 좋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선의가 반드시 선한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대통령께서 국정교과서를 밀어붙이시는 것도 나는 선의에서 비롯된 거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게 일단은 내 입장인 것으로 밝히고 싶을 따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면 다냐? 절대 아니다. 사랑한답시고, 당신의 삶을 좋게 만들어 준답시고 삽질에 삽질을 거듭하면 남는 건 넌덜머리나는 이불킥뿐이다.

사랑을 말로만 할 게 아니라면, 실제로 상대방의 삶을 좋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만약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삶이 부유한 삶이라면, 실제로 상대방의 삶을 부유하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

3. 오래 사랑하려면, 얻는 게 있어야 한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나약하고 간사해서, 변치 않을 것 같은 사랑도 별다른 피드백이 없으면 지치기 마련이다. 계속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무언가 보답을 받아야 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보답은 함께함일수도 있고, 감사의 표시일 수도 있고, 실제로 상대방의 삶이 개선되는 모습을 지켜봄으로써 얻는 뿌듯함일 수도 있겠다. 정말로 사랑한다면, 지치지 않고 오래 사랑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 둬야 한다.

4. 혹시 내가 폭력을 저지르고 있는 건 아닌지 끊임없이 돌아봐야 한다

사랑처럼 폭력으로 치닫기 쉬운 감정도 없다. 괜히 애증이라는 단어가 생긴 게 아니다. 우리는 부모가 자식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소중한 10대를 내내 입시지옥에서 시달리게 하는 걸 많이 보면서 살고 있다. 실제로 그렇게 빡세게 공부를 한 덕에 더 좋은 인생을 살게 됐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자식이 스스로의 삶을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그건 사랑이지만 동시에 폭력이다.

폭력적이지 않은 사랑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전략은 두 가지다. 첫째, 상대방과 내가 ‘좋은 삶’에 대해 공감대를 갖는다. 둘째, 상대방이 내가 자신의 삶을 좋게 만들기 위해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도록 한다. 개인적으로 키다리 아저씨처럼 이타적일 자신이 없기 때문에, 나는 될 수 있으면 첫째를 택하려 한다.


#사랑의기술vs연애의기술

사랑의 기술과 연애의 기술은, 조금 강하게 표현하면 ‘전혀 다른’ 기술이다. 사랑과 연애가 전혀 다른 개념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주관적) 정의야 위에서 언급했으니 넘어가고, 내게 연애는 ‘배타적으로 성적인 교감을 나누는 관계’다. 그러니까 사랑을 하지 않아도 연애를 할 수 있고, 연애를 하지 않아도 사랑을 할 수 있다. 물론 서로 엮인 부분이 많을수록 사랑을 하기도 쉽고 연애를 하기도 쉬우니 서로가 겹칠 확률이 높긴 하겠지만, 적어도 개념적으로는 전혀 다르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기술은 성숙한 사랑을 하기 위한 기술이다. 좋은 삶에 대한 통찰, 좋은 삶을 만들어 나갈 역량, 오래 사랑할 수 있는 끈기, 그리고 스스로의 사랑을 끊임없이 돌아보는 성찰. 다 #성숙한사랑의조건 에서 말한 것들이네.

연애의 기술은, 계속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기술이다. 관계를 맺는 기술. 서로가 서로를 계속 원하게 할 수 있는 기술. 계속 친밀하게 함께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 같이 있으면 편안하고 의지가 되도록 하는 기술. 질리지 않도록 적절한 신선함을 계속해서 줄 수 있는 기술.


#사랑과결혼의상관관계

그러니까 당연히 결혼 역시 사랑과 별개의 개념이다. 결혼은 연인 관계를 공식적으로, 법적으로 확고하게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제 정말로 이 사람하고만 성적인 관계를 맺겠어요!’ 분명 매우 특별한 관계가 되는 일인 건 맞지만, 부부가 특별한 건 사랑 때문이 아니다. 배타적인 성적 교감이 얼마나 대단한 건데. 그걸로도 부부는(그리고 연인은) 충분히 어마어마하게 특별한 관계다.

아무튼, 나는 사랑을 하지 않아도, 그러니까 배우자의 삶을 더 낫게 만들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지 않아도 충분히 결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배우자로 인해 내 삶이 더 풍요로워질 거라는 판단이 선다던지.

물론 내가 그럴 거라는 건 아니다. 나는 내 주변의 모든 특별한 사람들을 모두 사랑하면서 살고 싶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사는 건 적어도 내 취향은 아니다.


#사랑없이살수있을까

당연하다. 사랑은 인생을 ‘좋게’ 만드는 주요한 요소 중 하나지만, 사랑 없이도 인생은 충분히 멋질 수 있다. 단지 졸라 어려울 뿐이지.


#사랑할때포기해야하는것들

사랑은 감정이지만, 사랑을 한다는 건 행동이다. 그리고 감정은 행동 없이는 증명되지 않는다. 실제로 상대방의 삶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한 노력이 꾸준히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사랑을 했다고 볼 수 없다.

이 세상 모든 꾸준함은 참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사랑은 절대 자연스럽지 않다. 이 세상 모든 훌륭한 것들은 모두 자연스럽지 않다. 지극히 인공적이다. 멋진 소설도, 훌륭한 음악도, 위대한 기업도. 어떤 성취도 지루한 인내 끝에 만들어지지 않은 게 없다.

사랑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정말로 사랑하는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은, 지루함과 억울함, 서운함과 막막함을 친구로 둘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은 사랑하고 싶어하는 사람일 뿐, 실제로 사랑을 하는 사람은 아니다.


11월의 트레바리 34 책인 <사랑의 기술> 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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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술’을 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