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자본론’을 읽고

김아름님이 추천해 주신 <지적자본론>을 읽고 끄적인 글 두 개. 아름님 좋은 책 추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헤헿!


 

#‎실패‬ ‪#‎바텀라인‬

“실패만으로는 배울 수 없습니다. 성공을 해 봐야 배울 수 있지요.”

실패에서 배워야 할 건 사실 그렇게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특히 ‘아, 이렇게 하면 실패하는구나’ 식의 레슨은 함부로 배우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어제 누군가에게 실패를 안겨준 바로 그것 때문에 내일 성공하게 될 사람들이 숱할 것이기 때문이다.

실패에 익숙한 사람들이 엄한 데서 까탈스러운 모습을 많이 본다. 과거 실패한 경험의 산물이고, 안타깝게도 그 다음 실패의 징검다리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실패에서 배워야 할 건, ‘바텀라인의 확보’다. 추락하다 보면, 이따금 내가 어디까지 내려가도 괜찮은지, 우리가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다. 개인 혹은 조직이 데미지를 인식하는 역치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이 바텀라인은 우리를 과감하게 만들어 준다. ‘망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은 너무 많은 가능성을 놓치게 한다. ‘이게 잘 안 되더라도, 우리는 힘들지 않을 수 있어’라는 생각처럼 도전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생각은 없다.

바텀라인은 우리를 침착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요즘 같은 시대에 과감함은 성공의 필수조건 중 하나지만, 조급함은 실패의 단골조건 중 하나다. 과감하게 하면 도전이지만, 조급하게 하면 도박이 된다. 바텀라인을 확보하지 않은 채 조급하지 않은 침착함을 보여주는 사람 또는 조직을 나는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조금 세게 말하면, 나는 이러한 ‘바텀라인의 확보’가 우리가 실패에서 배울 수 있는, 혹은 배워도 괜찮은 거의 유일한 레슨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 이상한 것만 배우게 되더라.

사실 실패는 안 할수 있으면 안 하는 게 더 좋다. 특히 과정으로서의 실패가 아니라 결과로서의 실패라면 더더욱. 꼭 실패를 겪어봐야지만 바텀라인을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따지고 보면 바텀라인을 확인하는 것도 실패보단 성공에서 나오는 레슨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다. 버티기 혹은 극복의 성공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러니까 실패하지 말자. 작은 성공이라도 좋으니, 성공을 하고, 성공을 통해 성장을 하고, 성장을 통해 조금 더 큰 성공을 하자. 힝 제발ㅜㅜ


 

#‎현장‬

“사무실에 앉아있는 시간보다 ‘다이칸야마 츠타야서점’ 내부를 돌아다니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그 시간을 줄이고 사장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을 늘린다면 사장 자리를 계속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 데이터베이스의 이노베이션이란, 지적자본의 오픈 리소스화다.”

책상에선 아무래도 더 크게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전반적으로 맞는 말을 하기에는 책상 앞이 더 적절하다.

다만 책상 앞에만 있으면, 우리가 얼마나 니치한지를 놓칠 수가 있다. 100명 중 90명을 만족시킬 수 있는 아이디어가 나오더라도, 우리의 고객이 다른 10명에 해당한다면, 그 아이디어는 실패한 아이디어다.

현장에 가면, 눈 앞에 있는 디테일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어떤 니즈가 어떻게 충족되고 있는지를 보기에는 현장이 최고다.

그렇지만 현장에만 집중하다 보면, 매몰되기 쉽다. 특히 지금 존재하는 현장에만 집중할 때 더 그렇다.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10명은 세상의 전부가 아니다.

큰 꿈을 꾼다면, 아직 존재하지 않는 현장이나 우리와는 다르게 돌아가는 현장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모은 여러 현장들에 대한 인사이트를 묶고 쪼개서 새로운 현장을 만들어내는 건 책상의 몫이다.

책상과 현장의 유기적인 연계는 모든 조직이 꾸는 꿈 같은 거다. 위 인용구처럼, 그 실마리는 현장의 인사이트를 끊임없이 데이터화하는 끈기, 각기 다른 포맷의 데이터들을 하나의 언어로 기어이 표현해 내고야 마는 집요함, 그리고 현장 경험을 게을리하지 않는 리더에 있다고 생각한다.


 

#‎인상깊었던구절‬

“나는 지난 30년 동안 츠타야의 상품이 DVD나 CD, 또는 책이나 잡지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눈에 보이는 그런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각 상품의 내면에 표현되어 있는 라이프 스타일을 고객에게 제공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상품이라고 생각해 왔다. (…) 고객에게 가치가 있는 것은 서적이라는 물건이 아니라 그 안에 풍부하게 들어 있는 제안이다. 따라서 그 서적에 쓰여 있는 제안을 판매해야 한다.”

“자유롭게 존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렵고 힘들다. 관리받는 쪽이 훨씬 편하다. 그래서 부지불식간에 자신의 자유를 내던지고 관리받는 길을 선택하려 하는데, 그런 사원들에게 진정한 능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나는 자유를 요구한다. (…) 자유는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둔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순한 방종과 자유는 결정적으로 다른 위치에 존재한다. (…) 자신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행위는 당연하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자유가 냉엄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런 의미에서다. 하지만 자신의 꿈에 다가가려면 자유로워져야 할 필요가 있다. 아니, 반드시 자유로워져야 한다. (…) 묵묵히 일만 해서는 10년 후, 30년 후, 50년 후까지 존속할 수 없다. 사원들 각자가 ‘산고’를 겪지 않으면 미래를 열 수 없다. (…)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사명감이 필요하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해 두고 싶다. 단순히,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해야 할 일을 한다는 것이 자유다. (…) 자유를 입에 담기는 간단하지만 지속적으로 자유를 유지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것을 관철하려면 사명감이 필요하다.”

‘지적자본론’을 읽고

돈 많이 벌겠다는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습니다

2015년 기준으로, 한국인의 평균 은퇴 나이는 53세입니다. 가장 오래 다닌 회사에서 퇴사하는 나이는 평균 49세. 자회사 대표로 가거나 다른 회사 임원, 고문 등으로 가는 꿈 같은 커리어를 밟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테니까, 대부분은 49세부터 약 4년 동안은 눈높이를 확 낮추고 계약직 등을 전전해야 할 겁니다. 53세쯤 수십 년에 걸친 월급쟁이 생활을 ‘어쩔 수 없이’ 마무리지을 테구요.

다행히 최근까지 은퇴한 60대 초중반생들은 젊은 시절에 어느 정도의 재산을 모아둘 수 있었던 사람들이 제법 되는 편입니다. 문제는 몇년 후의 50대들과 40대 후반들, 그러니까 50년대 후반생 이전의 아줌마 아저씨들입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여태껏 아파트값 상승을 통해 자산을 축적해왔는데, 이 혜택을 제대로 못 누리기 시작한 세대들이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하우스푸어’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사람들.

그리고 이 흐름이 쌓이고 쌓여서 우리, 그러니까 80년대 중반 이후에 태어난 세대에 이르면, 상황은 한층 암담해 보입니다. 아마 우리들은 높은 확률로 50은커녕 40대 중반까지 일하기도 힘들 겁니다. 그때까지 돈을 모아두기도 힘들 거구요. 아무리 열심히 저축하고 적금 붓고 해봐야 세금 떼고 물가상승률 고려하면 실제로 투자수익률은 1%를 넘기기도 힘들 거고, 코스피가 무한 상승해서 인덱스 펀드에만 투자해도 쫙쫙 올라가던 시절은 다시 오지 않을 겁니다. 부동산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애초에 부동산 투자를 할 만한 밑천을 구하는 것도 어렵겠지만, 설령 어떻게 모아서 담보대출 끼고 집 한채 질러봐야 만족할만큼 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탓은 아닙니다. 한국이 드디어 먹고살만해져서(!) 저성장 궤도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냥 가난하게 살 수는 없습니다. ‘응답하라 1988’에서처럼 다같이 험블하면 또 모를까, 티비 보고 페북 보고 인스타 보면 맨날 훈남훈녀들이 간지템 착용하고 핫플레이스를 투어해 주십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라도 아웃라이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론입니다. 안타깝게도 여간해선 불가능할 것 같은 결론이기도 하지만요.

돈을 얼마나 많이 벌어야 많이 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사람마다 욕심이 다르니 기준을 마련하긴 어렵지만, 개인적으로 50살 때 순자산 10억 정도를 가지고 있을 수 있으면 그럭저럭 기깔날 수준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10억 정도면 수익형 부동산을 사거나 자산운용사에게 돈을 맡길 수 있는 금액입니다. 후하게 쳐서 세후수익률 6% 정도 먹는다고 가정하면, 월 500만원 정도의 자본소득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월세도 내야 하고 해서 아주 호화롭게 살 수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늘그막에 어디 가서 아쉬운 소리할 필요 없을 정도는 충분히 됩니다.

(상속/증여, 복권, 그리고 사업 등의 ‘대박’을 논외로 하고) 10억을 모으려면, 경제활동을 하는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월 3백만원씩 저축하면 됩니다. 월 3백만원씩 20년동안 연평균 3%의 수익률로 투자하면 10억에 조금 못 미치는 돈을 가지고 50살이 될 수 있습니다. 그동안 결혼이니, 육아니, 의료비니 해서 모아둔 돈을 쓰거나 저축을 멈추면 안 되는 건 함정. 그리고 요즘 세상에 평범한 개인이 연평균 3%씩 수익률 내기 어렵다는 것도 함정. 20년동안 월급 받는 것도 쉽지 않다는 건 더 함정.

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달에 2백만원은 쓰고 살아야 할 것 아녀요. 월세도 내야 하고, 가끔은 데이트도 하고, 일 년에 한 번쯤 제주도 정도는 다녀와야죠. 그런데 그러려면 한달에 가처분소득이 5백만원은 되어야 합니다. 2016년 기준으로 한달에 세후 5백만원을 받는 연봉은 7,300만원. 연봉 7천짜리 직장인이 열심히 아껴 써야 나이 들어서도 평생 아껴쓸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모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듯 ‘열심히 해서 부자가 되어 보이겠다’는 포부는, 진짜 어마어마한 경제적 성취를 일구어 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청년에게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빠른 속도로 몸값을 올려서 적어도 30대 중반 즈음에는 억대 연봉을 받아야지만 목표인 10억 혹은 그 이상을 노려볼 수 있습니다. 연봉 1억이 되더라도 월 실수령액은 7백만원을 넘기지 못합니다. 30대 초반에 미처 다하지 못한 저축액을 메우는 것도 벅찰 겁니다.

오늘날의 청년이 돈을 많이 벌고 싶으면, 꽤 조급해져야 합니다. ‘나는 대기만성형일 거야’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 사회는 대기만성형 인재에게 기회를 줄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인력들은 점점 더 고급화되고 있지만 고급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뭐하러 나이 먹고 이제서야 좀 잘해볼 것 같은 사람한테 기회를 주겠어요. 어지간해선 꼭 30대 초반부터 두각을 나타내야 합니다. 안그래도 짧은 청춘은 점점 짧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지간하면 그냥 돈을 많이 벌겠다는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습니다.

헉, 쓰고 보니 너무 비관적인 글이 되어버린 것 같은데, 저는 오히려 어쩌면 우리가 삶의 본질을 추구하기 보다 쉬운 사회에서 살아가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많이’에서 ‘여기만 넘자’가 되면, 아주 많은 사람들의 속이 아주 많이 편해질 거고, 그러면 남은 건 행복이고 지성이고 예술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관련글)

이육헌 님의 발제로 트레바리 34에서 2월에 함께 읽는 책, 박해천의 <아파트 게임>을 읽고 쓴 글입니다.

돈 많이 벌겠다는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습니다

전세계 화폐 총량

<사피엔스> 255페이지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주화와 지폐(은행권)는 화폐의 유형으로서는 드문 것이다. 세계 전체의 화폐 총량은 약 60조 달러지만 주화와 지폐의 총액은 6조 달러 미만이다. 돈의 90퍼센트 이상, 우리 계좌에 나타나는 50조 달러 이상의 액수는 컴퓨터 서버에만 존재한다.”

60조 달러? 에게, 겨우 이것밖에 안 되나? 전세계에서 가장 비싼 기업인 알파벳(구글)과 애플의 시가총액이 5,500억 달러 정도다. 아무리 잘나가는 회사여도 그렇지, 회사 하나가 전세계에서 돌아다니는 돈의 1%짜리라는 건 좀 이상하다. 심지어 올해 안으로 상장될지도 모른다는 아람코의 가치는 잘하면 10조 달러는 된다는데 말이다.

당장 세계 최대의 주식거래시장인 뉴욕증권거래소의 시가총액만 봐도, 20조 달러를 살짝 밑도는 수준이다. 나스닥, 런런, 도쿄는 각각 5조 달러 규모고, 상하이가 4조 달러, 홍콩, 유로넥스트, 선전이 3조 달러 정도. 서울은 1.2조 달러로 15위다. 혹시나 해서 1위부터 15위까지 더해 보니까 2015년 기준으로 딱 60조 달러 정도다. 전세계 다 합치면 70조 달러.

응? 그럼 60조 달러라는 숫자는 어디서 나온 거지? 혹시 번역이 잘못되었나 싶어 찾아보니 번역에는 문제가 없다. 그래서 더 찾아봤더니 ‘broad money’라는 개념이 있다. 경제학에서는 광의통화 혹은 m2라고도 부른다. 지폐랑 동전에다가 은행 구좌 잔고, 만기 2년 미만의 금융상품 등 현금화가 쉽고 빠른 돈을 합쳐놓은 액수를 말한다.

아마 <사피엔스>에서 언급한 ‘세계 전체의 화폐 총량’은 이 broad money를 말한 게 아닌가 싶다. 참고로 가장 최근에 집계된 world broad money의 규모는 약 81조 달러다. <사피엔스>가 2011년에 나왔으니, 그새 21조 달러 정도 늘어났나보다.

재미있는 건, ‘주화와 동전’은 현재 5조 달러 정도로 집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발 하라리가 책을 쓸 때와 비교하면 비슷하거나 오히려 줄어들었다는 뜻. 그러고 보면 일단 나조차도 5년 전보다 동전은 물론 지폐를 훨씬 덜 쓰고 있다. 사회의 개념화는 갈수록 빨라지고 있구나.

그 외에도 흥미로운 통계 자료들이 꽤 많다. 전세계에 있는 비트코인을 합치면 50억 달러. 전세계에 있는 금과 은은 각각 7.8조 달러와 140억 달러. 미국 국채의 총합은 4.5조 달러.

뭔가 괜히 무시무시한 통계도 있다. 전세계 채무의 양이다. 199조 달러다. 이 중 30% 가량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로 생겼다고 한다. 전체 채무의 30%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건 나라 빚이다. 60조 달러 정도. 4대 채무국인 미국이 17조 달러, 유럽이 16조 달러, 일본이 12조 달러, 중국이 4조 달러 어치의 돈을 갚아 나가는 중이다. 국가 채무 1,200조에 빛나는 한국도 한국이지만, 세계는 세계를 팔아도 반도 갚지 못하는 빚을 지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레버리지 세상!

제일 규모가 큰 숫자는 파생상품(옵션, 선물, 스왑 등) 관련 통계에서 나온다. 전세계 파생상품 가치의 총합은 무려 630조 달러에서 1경2천조 달러. 이쯤 되니까 괜히 세계 경제가 꽤나 아슬아슬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빅 숏>을 읽은 다음이라 그런지 이른바 전문가들이 만들어 놓은 안전장치에 대한 불신이 커진 요즘이라 더 그런가보다.

하여간에 <사피엔스> 재밌는 책이다. 전체적인 흐름도 재밌고, 이렇게 부분 부분에 꽂혀서 각종 뻘글을 써내게 되기도 하고. 두꺼워서 부담스럽긴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두번일겅 세번일겅!

전세계 화폐 총량

던바의 숫자

장안의 화제, <사피엔스>를 읽다가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과학적 연구 결과, 뒷담화로 결속할 수 있는 집단의 ‘자연적’ 규모는 약 150명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150명이 넘는 사람들과 알고 지내며 효과적으로 뒷담화를 나눌 수 있는 보통 사람은 거의 없다.”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52페이지.

‘던바의 숫자’가 떠올랐다. ‘던바의 숫자’는 옥스포드 대학의 로빈 던바 교수가 1992년에 제안한 개념이다. 한 사람이 맺을 수 있는 친밀한 관계는 평균적으로 150명 정도라는 게 주된 내용. 여기서 ‘친밀한 관계’란 급만남에도 어색하지 않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정도를 말한다. 그래도 에너지가 넘치면 230명까지는 친하게 지낼 수 있다고 한다. 반면 에너지가 없는 사람의 경우엔 100명 정도가 한계라고.

실제로 대부분의 자연 부락의 규모는 150명 정도였다. 카이스트의 정하웅 교수 팀이 2005년에 싸이월드에서 40만 명의 사용자들이 주고받은 일촌평을 분석했을 때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아, 그러고 보니 11년 전만 해도 우리 모두는 페이스북이 아니라 싸이월드를 하고 있었구나. 아무튼, ‘던바의 숫자’에 따르면 아무리 페이스북 친구가 많아도 결국 우리가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사람의 수는 150명 정도다.

그래서 친구 수를 150명으로 제한한 SNS 서비스가 나오기도 했다. 작년에 카카오에 인수된 패스(Path)가 그 예. 실제로 창업 당시 던바 교수에게 자문을 구했다고. 그나저나 카카오 입장에서는 송지호 부사장을 대표로 앉혔을 정도니까 나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트래픽이 꾸준히 성장중이라던가 수익화의 길이 보인다던가 하는 이야기는 딱히 나오지 않고 있는 듯하다. 하기야 아직 인수한지 1년도 안 됐으니까 뭐.

최근에는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인간이 ‘던바의 숫자’라는 한계를 극복해 나가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는 모양이다. 누군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안부를 묻고 근황을 나누는 행위가 필요한데, 페북이나 카톡 등으로 긴밀하게 연결된 오늘날에는 예전보다 훨씬 더 적은 에너지로 보다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심화하는 데 필요한 소통을 해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개개인이 기술의 도움을 받아 보다 많은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지는 사실 그렇게 중요할 것 같지는 않다. 어차피 요즘 같이 바쁘게 사는 세상에선 가까운 사람이 150명이 아니라 15명만 돼도 감사할 지경 아닌가. 그렇지만 조직적인 관점에선 매우 흥미로울 수도 있어 보인다. 공동체가 효과적으로 협업을 해나가기 위해서 필요한 구성원들의 관계는 사실 그렇게까지 깊지 않을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족같은 회사라고 더 잘 되는 건 아니지 않나.

모튼 한센 하버드 경영대 교수가 쓴 <협업>에도 이런 얘기가 나왔었다. 한센은 좋은 협업에 필요한 건 강한 유대(strong ties)가 아니라 약한 유대(weak ties)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기술의 발전으로 ‘약한 유대’를 맺고 유지하기가 쉬워졌다. 다른 말로 하면 이전보다 조직의 규모를 크게 가져가면서도 협업의 효율은 떨어뜨리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던바의 숫자

‘빅 숏’과 미니멀리즘

월스트리트에는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들 한다. 그런데 이 수많은 똑똑한 사람들 중 서브프라임모기지사태를 예측하거나 대비한 사람들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소수였다. 비단 08년 금융위기 뿐이겠는가. 월가의 우수한 인재들은 지금까지 수도 없이 ‘어리석어’ 왔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어리석다’. 똑똑한 사람은 정말 매우 드물다. 똑똑한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뭉치면 어김없이 ‘멍청’해진다. 결국 이 세상은 생각보다 굉장히 어이없게 굴러간다.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이 수도 없이 일어나는 이유는, 애초에 상식의 기준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높게 책정돼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니멀리즘은 언제나 답이다. 조금이라도 복잡해지면 안 된다. 조금이라도 어려워지면 안 된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어리석기 때문에, 본인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조차 모를 확률이 높다. 그래서 막 다룬다. 자신이 다루는 금융 상품이 정확하게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열심히 팔고 사고 한다. 자신이 입에 담고 있는 여러 멋져 보이는 말들이 정확하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민주주의니 정의니 평화니 한다. 물론 나빠서일 수도 있겠지만, 대개는 ‘머리가’ 나빠서 그렇다. 마냥 악의로만 가득찬 나쁜 사람들은 사실 그렇게 흔하진 않다.

문제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상대 역시 어리석다는 사실이다. 상대방이 얼마나 모르는지 모르기 때문에 상대방의 말을 믿는다. 그러려니 하고 금융 상품을 사고, 그러려니 하고 표를 던진다. 그리고 놀랍게도 자신이 잘 모르고 선택을 내렸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그러니 복잡함은 필연적으로 거짓을 낳을 수밖에 없다. 복잡함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복잡함을 다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든 왜곡이 생긴다. 왜곡은 거짓이다. 그리고 거짓이 쌓이면 비극이 된다. 슬프게도, 비극의 피해자는 언제나 그렇듯 약자다.

그래서 쉬워야 한다. 그래서 간단해야 한다. 설령 본인이, 혹은 본인이 속해 있는 집단이 놀랍도록 예외적으로 똑똑하다고 해도, 무조건 쉽고 간단하게 만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다음 타자까지 똑똑할 확률은 매우 낮기 때문이다. 약자는 쉬움과 간결함으로만 지킬 수 있다.

트레바리 36의 1월 책인 <빅 숏>을 읽고 쓴 글. <빅 숏>은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 때 시장의 몰락에 베팅해 큰 돈을 번 사람들의 이야기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 읽어보면 시장의 몰락을 예측하지 못했거나 않았던 멍청이들의 이야기에 훨씬 더 가깝다. 얼마 후에 ‘빅 쇼트’라는 제목의 영화로 개봉할 예정이다. 주연 배우들이 무려 브래드 피드, 크리스천 베일, 스티브 카렐, 라이언 고슬링. 독서 모임 끝나고 다같이 보러 가면 재밌을 것 같다. 홍진채형 발제 기대해 봅니다…

‘빅 숏’과 미니멀리즘

강렬함과 행복함 – ‘책 읽어주는 남자’를 읽고

어릴 때, 나는 사촌형들이랑 노는 걸 참 좋아했었다. 그렇지만 내가 사촌형들이 보고싶다고 칭얼댈 때마다, 엄마는 ‘또래들이랑 노는 것’을 강조하시곤 했다. 친구들이랑 놀아, 너 형들이랑 같이 학교 다닐 거 아니잖아, 라시면서.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엄마는 내가 또래 친구들과 노는 걸 시시하게 여길까봐 걱정하셨다고 했다. 마치 학원에서 이미 선행학습을 해버린 학생들이 도무지 학교 수업에서 흥미를 느끼지 못하듯이.

더 멋진 것, 더 대단한 것, 더 설레는 것이 반드시 더 행복한 삶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한번 맛보면 되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최소한 그만큼 멋지고 대단하고 설레는 것들과 함께하지 못하면, 삶은 욕구불만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아, 나는 분명 더 멋진 걸 알고 있는데, 나는 이것보다 대단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인데, 나는 더 설레 봤는데.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의 주인공 역시 비슷한 케이스가 아닐까. 주인공은 15살 때, 34살의 한나와 격정적인 사랑을 나눈다. 15살과 34살은 어마어마한 차이다. 열다섯의 소년에게 서른넷의 여인은 더없이 성숙하고, 섹시하고, 능란하고, 안정적일 수밖에 없다. 주인공은 어지간해서는 그 때의 희열을 맛볼 수 없다. 그래서 계속 방황한다. 그렇지만 그 때의 강렬함을 다시 추구할 용기는 없다. 그래서 일단 타협한다. 그렇지만 도저히 정을 붙일 수가 없다. 그리고 결국 게르트루트와 이혼한다.

운 좋게, 아니 어쩌면 운 나쁘게, 강렬한 경험을 하게 될 때가 있다. 그렇지만 이 강렬함이라는 것이 계속 우리 곁에 남아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강렬함을 붙들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책 읽어주는 남자>의 주인공에게는 세 번의 기회가 있었다. 한나가 수영장 앞에 나타났을 때, 재판장에서 한나를 만났을 때, 출소 직전의 한나와 재회했을 때. 그리고 주인공은 언제나 ‘한 발짝 부족했다.’

주인공이 딱히 못난 사람이라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냥 원래 이 ‘한 발짝’은 졸라 어려운 거다. 용기가 흔한 거였으면 용기라는 단어가 생길 필요조차 없었겠지. 평범한 사람이 갖기 힘든 미덕이기 때문에 용기가 용기인 거다.

그렇지만 용기를 내지 못하면, 그래서 ‘한 발짝’을 내딛지 못한다면, 계속 찝찝하게 살게 된다. 그 때만큼 심장이 뛰지 않아서,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내 길은 아닌 것 같아서, 약간의 무력감을 느끼면서 살게 된다. (물론 삶은 그런 우리를 위해서 망각이라는 마취제를 놔 준다.)

별 수 있나. 운 나쁘게 무언가에 강렬하게 끌려 봤으면, 좇는 수밖에. 혹시 아나. 나중에 돌이키면서 ‘그 때’를 운 좋았다고 추억할 수 있게 될지.

중학교때 리니지 할 때랑 고3때 수능공부 할 때가 그립다는 전치영을 위해 ㅋㅋ

강렬함과 행복함 – ‘책 읽어주는 남자’를 읽고

문제를 미루지 않고 정면돌파한다는 것,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를 읽고

1.

“사람이든 집단이든 타산지석으로 교훈을 얻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대부분은 스스로 고통을 겪고 나서야 배우는 법이다. (……) 그렇다면 일본이 그러한 선택을 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 웅번들이 서구 세력과의 무력 충돌에서 패했기 때문이다. (……) 이들 전쟁으로부터 3년 뒤인 1866년에 프랑스의 침략을 물리친 조선이 쇄국정책을 강화한 결과 국제 정세 변화에 더욱 둔감해진 것을 생각하면, ‘잘 진 것은 잘못 이긴 것보다 낫다’는 격언이 떠오른다.”

김시덕 교수의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이다.

2.

어떤 갈등이든 조짐이 보이는 즉시 터뜨리고 봐야 한다고 믿는 편이다. 문제를 수면 위로 끄집어낼 때의 그 불편함이 싫어서 묵혀 둬봤자, 문제는 점점 커지면 커졌지 절대로 해결되지 않는다. 어차피 헤어질 거라면 깔끔하게 헤어지는 게 낫고, 어차피 계속 볼 거라면 속시원하게 한바탕 하는 게 낫다. 피할 수 있는 걸 피하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것을 마주해야 한다.

개인적으로도 어떤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는 방법을 택했을 때 후회해본 적이 없다. 후회는 언제나 ‘하지 않음’ 또는 ‘나중에’의 몫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최악의 방법 중 하나가 ‘유예’다. 임시방편으로 일단 때우는 거. 일단 지금만 좀 넘기고 보는 거.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파국을 유예하고 나면, 거짓말처럼 평화가 찾아온다. 언제 이런 문제가 있었냐는 듯. 마치 해결된 것 같다. 그렇지만 해결하지 않고 일단 묻어둔 문제는 분명 다시 나타난다. 더 심각해진 형태로 나타난다. 애초에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였으면,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더 심각해지는 문제가 아니었으면, ‘파국’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일도 없다.

문제를 미룰 때만 해도, 우리는 ‘일단 이렇게 시간을 확보해 둔 다음 충분히 대비하고 성장해 놓으면 될 거야’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사람이든 집단이든 고통을 겪고 나서야 배우는 법이다.” 단순히 ‘이런 문제가 있다’는 것은 인식하는 것으로는 변할 수 없다. 본인이 변하지 않았는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 리가 있나.

어떤 문제가 있을 때, 내가 내린 선택이 과연 ‘정면돌파’인지 아니면 ‘유예’인지를 아는 방법 중 하나는, 그 문제를 공개적으로 떠들어보는 것이다. 사방팔방 떠들고 다니기에 께름칙한 게 있다면, 그 문제는 해결된 게 아니라 덮어둔 상태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해결된 게 아니라 해결하는 중만 돼도,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서 당당하게 발언할 수 있다.

3.

작은 실패는 때로는 문제를 해결하는 첫 단추일 수 있다. 혹은 해결해 나가는 과정일 수도 있겠다.

반대로 작은 승리는 때로는 진짜 큰 문제를 애써 무시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진통제로서 기능할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의 승리가 진짜 승리인지, 아니면 눈 가리고 아웅의 수단인지를 아는 방법은, 우리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 문제에 대한 자유로운 발언이 가능한지 테스트해 보는 것이다.

조선의 승리가 유예였던 이유는, 이후 서구 세력의 강대함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본인들도 두 차례 양요에서의 승리가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정말로 서구 세력이 두려운 게 아니었다면, 이런 위협이 있고 저런 위험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어야지.

반대로 일본의 패배가 패배가 아니었던 이유는, 계속해서 그 문제를 물고 늘어지는 것이 오히려 장려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이렇게 해결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저렇게 대응하는 게 바람직하다, 이런 얘기가 자유롭게 오고갈 수 있었다. 한마디로 일본은 문제를 마주했고, 정면 돌파하는 중이었다.

그 결과, 안타깝게도 조선의 의사결정은 미스의 연속이었다. 반면 일본의 의사결정은 개선과 누적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의사결정들의 차이가 백 년 동안 쌓이고 난 다음의 결과는 빌어먹을 일본의 식민 통치였다.

요즘 한국 사회 곳곳에서 애초에 발언 자체를 금지하려는 태도가 보인다. 아마도 본인들이 내리는 선택들이 각종 문제들을 덮어놓는 데서 그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테다. 그분들이 한번이라도 이렇게 ‘유예된 파국’이 나중에 어떤 세상을 만들어낼지 생각해 주시면 좋겠지만, “사람이든 집단이든 고통을 겪고 나서야 배우는 법”이기 때문에, 어쩌면 다 같이 빨리 X돼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4.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는 트레바리 36에서 12월에 함께 읽는 책이다. 발제자는 이인묵님. 개인적으로 최근에 읽은 책 중 가장 재미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진 뻘글을 쓴 것에 대해 변명을 하자면, 일단 큰 얘기를 하는 것을 어려워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https://goo.gl/fWol8m) 최근에 워낙 생각 없이 살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게다가 매달 꼬박꼬박 세 권의 책을 읽고 세 편의 독후감을 써 내다 보니, 더 이상 남은 콘텐츠가 없다는 것도 문제다. 빈 곳간에서 보물이 나올 리가.

그래서 발제자인 인묵님께 SOS를 쳤었다. ‘주제 잡기가 너무 힘들어요.’ 그랬더니 인묵님이 친절하게 세 가지 옵션을 던져 주셨다. 1) 만주 혹은 북한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 것인가. 2) 오늘날 한국 사회의 사고 방식의 한가운데에는 중국이 있을까, 아니면 미국이 있을까. 3) 한국 사회는 ‘텍스트’를 얼마나 신뢰할까.

아아아…세상에 이렇게 어려운 주제를 던져주시다니요. 질문 하나씩을 잡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봤는데, 중학생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뻔한 이야기 말고는 도무지 생각이 안 난다. 그래서 포기하고 이런 뻘글을 썼다. (인묵님 죄송해요 ㅋㅋㅋ)

문제를 미루지 않고 정면돌파한다는 것,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를 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