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의미로서의 종교와 기독교 – ‘예수’를 읽고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종교는 마주치게 될 수밖에 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제 좀 살 만해서 잉여라는 게 생기고 그 잉여 시간에 생각이란 걸 하게 되면, 사람은 누구나 ‘왜 살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종교는 이 ‘왜 살지’에 대한 각자의 대답이다. 어떤 사람은 기독교를 종교로 택해서 예수처럼 살기 위해 산다. 불교를 택해서 깨달음을 얻고 윤회의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 사는 사람도 있다. 음악이 종교인 사람도 있을 거다. 아마 그렇게 되면 더 나은 궁극의 멜로디와 리듬을 위해 살겠지. 돈이 종교인 사람도 있을 거고, 출세가 종교인 사람도 있을 거고,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사는 사람도 있을 거다.

삶의 의미는 찾는 게 아니라 결정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찾으려면 이미 어딘가에 있어야 하는데, 삶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본인이 의미를 만들어내기 전까지는.

무서운 얘기일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정말 멋진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노래만 부르는 가수보다 싱어송라이터를 더 높게 친다. 삶도 그렇지 않은가. 본인이 직접 만든 의미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삶이라니, 이만한 예술이 어디 있나.

그래서 나는 종교를 선택할 때 ‘믿을 만한지’는 그렇게 중요한 고려사항이 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믿을 만하기 때문에 믿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믿어야 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그러니까, ‘믿을 만한지’보다 중요한 건 ‘믿기 쉬운지’다. 내가 열과 성을 다해 믿을 수 있는 것인가. 그래서 이 종교를 통해 내 삶이 행복해지고 의미있어지고 충만해질 수 있는가. 물론 본인이 선택한 종교에 대한 책임은 져야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점점 믿기 어려운 종교가 되어가고 있다. 교리들이 사실과 어긋나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의 대응 중 그나마 가장 효과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라고 여겨지던 수많은 교리들을 일일이 상징화하고 신화화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말라죽였다’는 마가복음 11~14장의 내용을 ‘바리새인을 비판한 것’으로 해석하는 식이다.

그렇지만 이런 상징화 또는 신화화는 기독교가 믿기 어려워지는 속도를 늦추는 정도의 역할밖에는 하지 못한다고 본다. 기독교를 점점 복잡하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복잡하면 믿기 어렵다. 기독교가 복잡해질수록, 복잡한 것을 해석할 수 있는 지적 역량과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기독교를 믿기 어려워진다.

개인적으로 기독교가 장기적인 차원에서 교세를 확장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유지라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게 있다면 그건 ‘과감한 교리의 구조조정’일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이 아닌 것들은 죄다 빼 버리는 거다. 상징으로 해석해야지만 팩트체킹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성경 구절들을 전부 다 쳐내는 거다. 그렇게 해도 핵심은 남길 수 있다. 기독교의 본질은 ‘예수와 같은 삶을 살자’ 아닌가. 신화적인 요소들을 빼도 예수의 삶은 충분히 인생의 목표로 삼을만 했다.

‘역사적 예수 읽기’를 통해 기독교를 살리기 위해서는, 믿기 어려운 것들을 상징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를 더 어렵고 복잡하게 만드는 일일 뿐이다. 그보다는 믿을 필요가 없는 것들을 쳐내고, 믿어야 하는 것들을 간결하게 정리해야 한다.

나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기독교라는 종교가 올바른 방향으로 계속 번영해 나가길 바란다.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기독교라는 종교 집단이 이대로 없어지거나 ‘미신 집단’으로 격하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좋은 종교는 많은 사람들에게 훌륭한 삶의 의미를 선물할 수 있고, 함께 그 의미를 추구해 나가는 공동체를 마련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포기하기엔 인류는 커뮤니티가 너무 부족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기독교가 혁신적인 자정 능력을 보여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독단적이거나 게으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인 이익 집단 정도로 여겨지다가 서서히 사라지지 않을까. 물론 수백 년 뒤의 일이긴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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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로서의 종교와 기독교 – ‘예수’를 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