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는데다가 유익하기까지 한 게임을 만들려면 – 라프 코스터의 재미 이론을 읽고

<라프 코스터의 재미 이론>을 읽었다. 11월의 트레바리 독토 책이고, ‘울티마 온라인’ 등을 개발한 게임업계의 전설 라프 코스터 아저씨가 쓴 책이다. 크게 세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첫째, 게임은 이래서 재미있다. 둘째, 그러니까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 한다. 셋째, 단순히 재미있는 게임을 만드는 걸로는 부족하다, 게임은 재미뿐만 아니라 의미까지 있어야 한다.

어느덧 세상에 나온지 십 년 하고도 이 년이나 지난 책이라, 지금의 현실과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내용들이 많다. (어느샌가부터 우리는 12년이 어마어마하게 긴 세월로 여겨지는 세상에 살고 있다.) 예를 들어, 이 책이 나온 2003년에 내가 해본 모바일 게임이라고는 컴투스에서 나온 붕어빵 타이쿤이 전부였다. 게다가 당시에 내 핸드폰은 무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노키아 제품이었고. 흑백이었던, 뭉툭했던, 통화할 때는 안테나를 뽑아 써야 했던.

그렇지만 큰 틀에서는 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게임이 왜 재미있고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기 위해 뭘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서는 크게 이견이 없다. 인간의 진화 속도는 사회의 진화 속도보다 훨씬 느리기 때문에, 아직도 우리는 본질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이천 년 전 사람들과 다를 바가 거의 없다. 하물며 십 년 전 이야기야 말할 필요도 없겠지. 우리는 여전히 비슷한 방식으로 재미를 느끼고, 앞으로도 꽤 오랜 시간 동안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위에서도 언급했듯, 인간은 그대로일지 몰라도 세상이 변했다.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 버디버디랑 프리챌이 카톡이랑 페북으로 변했으니 말 다 했지 뭐. 일일이 열거하자면 한도 끝도 없겠다.

게임 시장도 많이 변했다. 게임 시장은 2003년에는 글로벌리 230억 달러 규모였는데, 올해는 900억 달러를 너끈히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고작 12년만에 산업 규모가 3,900%나 증가한 셈이다. 그만큼 업계도 많이 성숙해졌다. 중견 회사 이상 즈음 되면 주먹구구식으로 게임을 만드는 거의 없다. 동작 하나하나에 로그를 박고 데이터 분석을 돌린다. 고작 국내용 모바일 게임 하나 만드는데 모델이 차승원이고 이병헌이고 심지어는 올랜도 블룸이다.

이렇게만 보면 되게 멋진 것 같지만, 사실은 2003년보다 더 팍팍해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게임이 돈 되는 일이라는 걸 너무 많은 사람이 알아 버렸다. 그래서 자본 시장에서도 돈이 힘차게 굴러들어오고, 머리 좋고 야심 짱짱한 젊은이들이 인생을 걸고 업계로 뛰어들고 있다. 이제 낭만이고 나발이고 살아남기 바쁘게 됐다. 당장 올해 연말만 해도 넥슨이랑 4:33이랑 넷마블이 ‘거의 비슷한 게임’을 들고 나와서 맞짱을 뜬다. 셋 중 둘은 수백억 개발비를 날리게 될 거고, 영광의 승리자는 천 억을 벌 예정이다. 셋 중 가장 큰 회사라 하면 넥슨일 텐데, 아무리 넥슨이라고 해도 수백억을 날린다는 건 보통 큰 타격이 아니다. 이래저래 필승의 각오로 매순간 달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개인적으로 이데아가 잘 됐으면 한다. 왜냐하면…)

이런 상황에서 라프 코스터가 역설하는 것처럼 ‘게임을 하다보니 더 나은 사람이 되었어요!’를 생각할 겨를이 있을까? 여간해선 아니지 싶다. 다른 건 몰라도 생존이 걸려 있을 때, 대부분의 인간은 가치를 추구할 여유를 가질 수 없다. 하물며 개개인보다 훨씬 도덕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집단에서야.

집단 단위에서 (여기서 집단은 기업일 수도, 정당일 수도, 업계일 수도, 국가일 수도 있다.) 가치지향적인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집단 내에서 확고한 권력을 지닌 ‘위대한 개인’이 막무가내로 비전을 향해 모두를 이끌어간다. 둘째, 생존의 문제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당연하게 여겨진다.

첫번째의 대표적인 예시가 테슬라다. 우리는 인류를 위한 비즈니스를 하는 회사예요! …라고는 하지만 사실 테슬라는 언제 적자를 면할지 모르는 회사고, 계속해서 자금을 수혈받지 않으면 안 되는 회사고, 그렇지만 계속해서 비전을 조직 내 DNA에 깊숙이 새기고 달려가는 회사다. 아무리 테슬라에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고는 해도, 지금까지 테슬라가 비전을 위해서 달려왔고 또 지금 달려갈 수 있는 원동력은 순전히 엘론 머스크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테슬라에 대해 물음표를 가지고 있는데다가 (아니 아무리 인류를 위한다고는 하지만 직원들을 그렇게 대해도 되나?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하는 것이 지나치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독재형 리더십이 한번 선례로 자리잡으면 별의별 이상한 사람들이 ‘나도 엘론 머스크 타입이요’ 하면서 깝치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나는 첫 번째 방법에는 부정적이다.

그럼 남은 건 두 번째 방법. 그리고 이 두 번째 방법을 선택하는 방법은 네 개다. 하나, 대기업일 것. 둘, 멤버들이 다른 방식으로 생존이 해결돼 있을 것. 셋, 레알 개짱 천천재의 원맨플레이. 넷, 업의 일반적인 retention rate가 높을 것.

첫 번째 방법인 ‘대기업일 것’. 국내에서 ‘일정 수준 이상으로 생존이 보장된’ 게임 회사는 넥슨과 엔씨 둘 정도가 아닐까 한다. 넷마블이야 아직 안심하기에는 쌓아놓은 현금으로 보나, 롱런하는 게임의 보유 유무로 보나 리스크가 좀 있을 테니.

넥슨이랑 엔씨 정도 되면, 적어도 중소 프로젝트 규모에선 새로운 도전을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라프 코스터가 말하는 것 같은. 지금 인류에게 필요한 덕성이 뭔지부터 치열하게 고민하고, 이를 게임으로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도록 하는 메커니즘을 개발하고, 재미까지 있게 만드는, 그런 위대한 시도.

그게 아니라면 일단 돈을 버세요, 라고 말하고 싶다. 아니면 금수저세요? 라고 물어보던가. 개개인이야 불굴의 의지와 빛나는 선의로 무장할 수 있다. 그렇지만 집단은 그렇게 못한다. 그리고 게임은 보통 집단이 만든다. 생존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가치를 강조해봤자, 그 가치는 전투적인 적대감이 덧씌워진 채로 왜곡되거나 아니면 사그라들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먼저 생존을 해결한 다음 가치를 추구하자’ 역시 가능성으로 따지면 낮은 건 매한가지다. 우선 생존이 충분히 해결되는 일 따윈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며(…), 충분히 해결된 다음에 우리에게 이른바 초심이라는 형태의 선의가 남아 있을 가능성 또한 매우 낮기 때문이다.

셋째 방법. 혼자서 마인크래프트를 만든 마르쿠스 페르손이 좋은 예다. 혼자 만든 것 뿐인가. 출시 후 회사 만들기까지 무려 1년 반을 거의 혼자서 버텼으니,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대단함은 2.5조짜리 엑싯으로 보답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기술에서 희망을 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고도로 복잡해진 현대 사회에서, 영웅의 출현이 가능한 필드니까.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형태의 혁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내가 할 게 없다.’ 천재 나오고 영웅 뜨면 당연히 응원하고 지지하고 가슴 설레 하겠지만, 막연히 기다리고만 앉아있기엔 뭔가 찝찝하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의 가치 실현 방식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결국 대부분의 우리에게, 정답은 네 번째 방법이다. 업의 본질적인 특성 자체로 인해 생존을 위한 투쟁 외에 곁다리로 무언가를 얹을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내가 독서 모임이라는 말도 안 되는 사업 모델을 잡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크게 빵 하고 터지면서 몇십 몇백억짜리 잭팟이 터지진 않겠지만, 어영부영 먹고 살 수는 있는 일, 그리고 계속해서 먹고 살기 위해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를 잊지 않아도 되는 일. 나는 독서 모임이 그런 일이라고 봤다. 왜냐하면 돈이 안 되니까. 그래서 경쟁이 빡세지 않으니까. 그래서 오히려 계속 돈을 벌 수 있으니까. 아직 증명이 된 건 아니라 쫄리긴 하지만.

결국 ‘가치를 지향하는 비즈니스’에서 제일 중요한 건 리텐션이다. 개별 기업이 아니라 산업 전체의. (그런 점에서 지금의 게임 시장에서 가치를 추구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독서 모임 시장이 어마어마하게 커지고 그래서 플레이어가 많아지고 그 결과 경쟁이 빡세지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도 있겠다. 개인적으로 그런 날이 꼭 왔으면 좋겠다. 그러면 정말 기쁜 마음으로 경쟁할 수 있을 것 같고, 도태되더라도 기껍기 그지없을 것 같다. 나야 또 다른 사업 기회를 찾으면 되니까. 리텐션이 높을 수밖에 없는, 구리디 구린 사업 모델을.

다 쓰고 보니까 다 어렵긴 매한가지다. 카리스마 쩌는 리더가 되는 것도 어렵고, 회사를 한숨 돌릴 수 있을 때까지 키우는 것도 어렵고, 슈퍼초울트라천재가 되는 것도 어렵다. 그냥 이 중에서 자기한테 제일 쉬워보이는 걸 선택하면 되는 것 같네. 물론 내가 선택한 방법이 대다수의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길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먼저 틀을 잡고 쓴 게 아니라 생각나는대로 휘갈겨 쓴 글이라 또 주절주절 길어졌네요. 죄송할 따름입니다…죄송하니까 읽을만한 링크 하나 던지고 갑니다…게임 업계에서 10년간 잔뼈 굵은 강민구 님의 멋진 글이에요…

재밌는데다가 유익하기까지 한 게임을 만들려면 – 라프 코스터의 재미 이론을 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