랄프 왈도 에머슨의 ‘자기 신뢰’를 읽고

랄프 왈도 에머슨의 <자기 신뢰>를 읽었다. 무려 오바마가 ‘인생의 책 세 권’ 중 하나로 꼽은 책이다.


1.

책의 어조는 꽤나 단정적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에게 널리 감명깊게 박히는 메시지들을 보면 어조들이 참 단정적이다.

단정적이라는 것은 뚜렷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뚜렷하다는 건 모든 것들을 포괄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뚜렷하면 허점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허점투성이가 될 정도로 뚜렷한 색깔을 가지지 않으면, 누구와도 척을 지지 않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누구에게도 침투해 들어갈 수 없다.

결국 용기의 문제다. 학창시절 때 보던 시험과는 달리, 삶의 모든 문제는 정답이 여러 개인 주관식이다. 어떤 답을 택하더라도 어떤 주관에 의해서는 틀린 답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문제를 맞추고 싶으면 문제를 틀려야 한다.

아, 아예 문제를 안 푸는 방법도 있다. 그러면 안 틀릴 수 있다. 그리고 남들이 푼 문제를 까기만 해도 되긴 된다. 어떤 답안지에도 허점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잘못되었다, 저런 한계가 있다, 이걸 간과한 듯하다, 등등등. 할 말은 많다.

다만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삶을 살 뿐이다.

물론 용기가 지나치면 만용이 되고, 확신이 지나치면 꼰대가 된다. 뚝심과 똥고집은 종이 한 장 차이다.

강한 자기 확신을 가지면서 동시에 개방적이고, 유연하고, 무엇보다 연대할 수 있으려면 언제나 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있다. 삶의 찬란함은 언제나 모순의 한가운데에 있는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불확실함에 오히려 설렐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진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참조: 미래에 대처하는 법: 불확실성을 즐겨라 (정지훈)


2.

의외로 정답은 이미 나와 있는 경우가 많다. 공부 잘하고 싶으면 덜 놀고 공부 오래 하면 된다. 살 빼고 싶으면 덜 먹고 운동 많이 하면 된다.

그렇지만 공부 잘 하고 싶어하는 모든 사람이 공부를 잘 하는 건 아니고,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은 모든 이들이 슬림한 바디 라인을 자랑하고 다니는 건 아니다.

뻔히 정답을 알아도, 그 답을 선택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다른 선택지를 찾는다.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마법의 선택지를 찾는다. 그렇지만 마법은 동화 속 이야기고, 우리가 사는 곳은 현실이다. 알면서도 우리의 마음은 계속 동화 속을 떠다닌다.

동화를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정답은 지나치게 희생이 큰 것처럼 보이게 된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정답은 정답이 아니게 여겨지게 된다. 마음 속에 설 자리를 잃고 만다.

이 역시 결국은 용기의 문제다. 뻔히 보이는 고생길을 걸어낼 수 있는 용기의 문제.

그렇지만 대부분의 우리들은 겁이 많다. 그래서 우물쭈물하다 결국 삶이라는 문제지에 아무 답도 쓰지 못한다. 어디로 가야할 지 뻔히 알고 있는데도. 급기야는 정답이 무엇인지도 잊어버리게 된다.

아이들은 속 편하게 당연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어른들은 당연한 걸 당연하다고 말하기 힘들어한다.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게 되기 위해선 얼마나 복잡한 뒷사정이 동반되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속 편하게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청년들에게 ‘아직 철이 덜 들었으니까 할 수 있는 말이지’라고 말하는 어른들의 진짜 심리는 어쩌면 질투가 아닐까 싶다.


3.

이러저러하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화두들을 던져주는 책이었다.

그렇지만 책 자체가 품고 있는 콘텐츠만 놓고 보면 사실 별 거 없다.

살짝 과장을 보태면, 페이스북에서 떠돌아다니는 수많은 명언들을 모아 놓은 느낌이다.

그렇지만 어쩌면 오히려 그래서 좋은 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고전이라고 부르는 책들은 보통 떠먹여주는 책,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라고 명료하고 체계적으로 전달해주지 않는다. 대신 ‘아,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하면서도 계속 꾸역꾸역 읽다 보면 머릿속에 각종 생각들이 치고받게 한다.

누가 한 소리였던가. 고전들은 소화시키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는 책인 경우가 많다.

아마 오바마도 에머슨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기보단, 에머슨이 꺼내놓은 여러 화두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하다 보니 ‘이 책 덕분에 한 생각들이 이리도 많구나!’라고 느끼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요즘은 뭐가 됐든 곱씹기 힘든 세상이다. 하도 먹을 게 널려 있어 소화시킬 틈이 없다. 그러다 보니 보고 들은 건 많은데 남는 건 없기 쉽다.

에머슨은 “도서관은 우리의 재치에 과부하를 준다”고 말했다. 그 때와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콘텐츠가 범람하고 있는 지금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독서 모임을 하면서 강제로 독후감을 씁시다…

랄프 왈도 에머슨의 ‘자기 신뢰’를 읽고

랄프 왈도 에머슨의 ‘자기 신뢰’를 읽고”에 대한 5개의 생각

  1. 유성민댓글:

    어제 인상깊게 본 포스팅에 대화가 생각나는 주제라 반가운 마음에 글 남깁니다.
    “보편적 진리를 말하는 것은 나한테 중요하지 않고 나의 편견을 끝까지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그의 말처럼. “잘 쓴 글이라는 건 자기의 많은 편견과 아집이 들어 있어야 한다”는 게 김훈 국장의 생각이었다.
    http://aquavitae.egloos.com/3402300
    http://kankan1.egloos.com/2464428 (저 문장이 포함되어 있던 포스팅전문)
    논란이 되었고, 많은 파장을 일으켰던 대화라고 하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의 흐름자체가 흥미로운거 같아 오지랖 넓게 댓글 달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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