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의 ‘말하다’를 읽고

김영하의 <말하다>를 읽었다. 읽으면서 ‘제 멋에 겨워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뜻으로 한 말이다. 사람은 어느 정도는 제 멋에 겨워 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너무 객관적으로 자신을 진단해봤자 초라해지기밖에 더 하겠나.

‘제 멋에 산다는’ 건, 삶에 있어서 일종의 ‘자기완결성’을 가지는 거다. 그러니까 스스로의 삶이 그 자체로 가치 있고, 그 자체로 아름다워지는 거다. 내가 부유하든 가난하든, 잘생겼든 끔찍하게 생겼든, 똑똑하든 멍청하든지 간에. 다른 말로 하면, 자기완결적인 삶의 태도는 외부 환경의 변화와 상관 없이 소중한 ‘나’를 갖는 것을 말한다.

요즘같이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네에겐 꼭 필요한 역량이다. 예전에야 십 년이 지나도 세상이 지금이랑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믿을 수 있었다. 아니면 적어도 예상한 대로 흘러가겠거니 하고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헛된’ 믿음을 가졌다간 멘탈이 남아나질 않을 거다. 안정적으로 미래를 대비할 수 있을 확률은 점점 낮아지고 있다. 아니, 도대체 2005년의 누가 십 년 후엔 한 달에 50만원만 내면 빌릴 수 있는 로봇이 식당에서 24시간 내내 서빙을 할 수 있게 될 거라고 상상을 했겠나. (누구긴 누구야 손정의지…)

그러니까 삶의 의미와 간지를 외부에 위탁한다는 건, 그 어느 때보다도 위험해졌다. 도대체 얼마나 믿을만한 사람이길래, 회사이길래, 나라이길래, 사상이길래, 내 삶을 위탁할 수 있는가.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이길래, 재산이길래, 명예이길래, 내 자존심을 걸 수 있는가.

물론 그럴만한 대상을 찾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건 나름의 복일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외부 세계의 변화에 상관 없이 내 안에 믿을 만한 구석을 하나쯤은 갖춰 둬야 한다. 아무리 외적 조건이 그럴듯해도, 이게 언제 날아가버릴지 모르는 세상에서 살게 됐기 때문이다.

삶의 자기완결성을 확보한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해할 줄 알게 된다. 그런데 이 말은, 외부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더 잘 버틸 수 있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른 말로 하면, 삶의 자기완결성은 스스로에게 뚝심과 베짱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그리고 뚝심과 베짱으로 버티고 조지고 지르다 보면, 결국 상황은 좋아지게 돼 있고 맞아 떨어지게 돼 있다. 결과적으로 ‘나는 나라서 간지나’, ‘내가 나를 좋아하는 이유는 내가 나이기 때문이야’ 식의 마인드는, 외부와는 별 상관이 없는 태도지만, 외부 세계에 더 잘 대응하게 해 준다.

이런 자기완결성은 스스로에 대한 애정과 신념이 견고하게 축적되지 않으면 형성될 수 없다. 자기완결성 역시 연습의 산물이다. 스스로가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스스로의 생각에 촘촘히 논리를 더해야 한다. 이런 자존의 시간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그 자체로 봐줄만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제 멋에 겨워 사는 정도가 지나치면 안 된다. 자칫하면 자폐가 된다. 나만의 세계에 틀어박히고만 싶고, 그 세계에서 좀처럼 나오려 들지 않는다면 자폐가 된다. 내 세계가 있지만, 그래서 여차 하면 그 세계에 들어가서 나를 지켜낼 수 있지만, 내 세계 밖에서 돌아다니는 것을 겁내지 않을 수 있을 때, 좋은 의미에서 ‘제 멋에 사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근데 이거 가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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