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과 몰입 (대화)

퍼져 있느라 아무 의미 없이 흘러갈 뻔한 일요일 저녁을 풍성하게 채워 준 친구와의 소중한 대화. 말투 등 소소한 편집이 있긴 했지만, 내용에는 하나도 손 안 댔다. 나는 A였을까, B였을까?ㅎㅎ


A: 영화관 가고 싶다.

B: 집에서 보면 되잖아.

A: 아니야. 영화관에서 보는 거랑 달라.

B: 집에서 보는 거랑 뭐가 다르지? 일상에서 벗어나는 기분이 드나?

A: 그런 것도 있고. 그런데 몰입의 즐거움이 가장 큰 것 같아. 집에서 영화를 보면 컴퓨터도 봤다가, 카톡도 했다가, 전화 오면 전화 받게 되잖아. 그러다 보면 온전히 몰입하기 힘들어.

B: 그럼 뭔가에 ‘몰입’하고 싶은 욕구가 영화관에서 제일 ‘쉽게’ 제공되는 건가?

A: 응. 편한 거지. ‘난 문화생활을 한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도 좋고.

B: 그렇구나. 난 영화관에 가면 두 시간 동안 얌전히 누가 제공해주는 경험이 떠먹여지는 기분이라 가끔씩 불쾌한 적도 있었거든.

A: 그래서 너한테 영화 보러 가잔 소리 안 하잖아.

B: 어…그나저나 한국에서 영화가 제일 큰 문화 생활 섹터라는 건 역시 그게 통한다는 건데, 이왕이면 사람들이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네.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건 ‘난이도’가 높으니까 확실히 덜 매력적일라나.

A: 아무래도 그렇겠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체적이거나 능동적이라고 해서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잖아.

B: 아니야. 누구나 매력을 느끼는데 아직 그 매력을 모른다고 보는 게 더 적절한 것 같아. 어쨌든 몇 안 되는 일상 속 몰입의 경험이 수동적인 건 뭔가 성에 안 차네.

A: 그만큼 몰입하기 힘드니까. 그래서 자꾸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찾게 되는 것 같아. 공부하러 도서관 가는 것도 그렇고.

B: 그러고보니까 도서관도 있구나.

A: 응. 집에 홈씨어터나 서재 만드는 것도 비슷한 욕구인 것 같고. 집에 영화관이랑 도서관 갖다 놓는 거잖아. 더 잘 집중하려고. 더 잘 몰입하려고.

B: 어차피 똑같은 집인데?

A: 홈씨어터 룸은 ‘영화를 보기 위한 공간’이잖아. 내 방은 ‘이것저것 하는 공간’이고.

B: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에 영향을 받는 거랑 비슷한 건가. 특정한 정신 상태를 위해서는 환경이나 공간이 중요하다는 뜻이네. 자기집 화장실에서만 X 잘 싸고 자기집 침대에서만 잘 자는 거랑 비슷한 건가.

A: 응. 어떤 콘텐츠를 접하든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아.

B: 그럼 영화관에 가서 몰입을 하면 재미를 얻을 수 있고, 도서관에 가서 몰입을 하면 효율을 얻을 수 있는 거라고 봐도 좋으려나.

A: 아니. 재미+효율=몰입인 것 같은데.

B: 응? 도서관도?

A: 공부도 몰입할 수만 있으면 재밌어. (이 몰입의 상태를) 끝내기 싫고, 왠지 아쉽고.

B: 그러면 콘텐츠나 활동 자체의 특성과 상관없이 몰입하면 무조건 재밌다? 재밌는 걸 해야 재밌다기보다 몰입해야 재밌다?

A: 난 그렇다고 봐. 처음에는 재미 없어도 계속 이거 생각하고 이것만 보고 보고 또 보다 보면 갑자기 집중도 확 올라가고 그러다보니까 재미있고. 글 읽을 때도 그런 것 같아.

B: 오호. 그럼 평소에 몰입이 어려운 이유는 뭘까? 만약에 어떤 개인이 ‘몰입하는 능력’이 좋으면 굳이 돈 안 쓰고 영화관 안 가도 될 거 아냐.

A: 응. 만약 내가 지금 유튜브에서 3분짜리 동영상 보고 나서 영화관에서 느끼는 정도와 같은 수준의 몰입도나 감정을 경험하면 영화관 절대 안 가겠지.

B: 그런데 몰입하는 능력도 길러질 수 있는 능력일 거잖아. 뭐 좋은 아이디어 없어?

A: …

B: 음, 생각해보니까 방금같은 질문 (뭐 좋은 아이디어 없어?) 은 정말 최악인 것 같다.

A: 맞아. 어떤 맥락에서의 무슨 아이디어를 원하는 건지 말해줘야지.

B: 몰입을 자꾸 자주 하다 보면 몰입하는 법을 알게 될라나?

A: 특정한 것에 대한 몰입을 자꾸 하다 보면 스킬이 늘 것 같기는 한데, 그렇게 해서 얻은 몰입 능력은 그 ‘특정한 것’에 한정될 것 같아.

B: 영화 감상 몰입 스킬이랑 공부 몰입 스킬은 다를 거라는 뜻이지? 사람들이 책도 잘 읽게 하고 이야기도 잘 할 수 있게 하고 글도 잘 쓰게 하고 영화도 잘 볼 수 있게 하고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는 거구나.

A: 영화랑 공부는 정보가 제공되는 형태가 다르잖아.

B: 그럼 정보의 유형에 따라 그 정보에 반응하는 법이 매우 다를 거고, 그러니까 특정한 포맷마다 몰입하는 법은 다를 거라는 건가. 그러면 뭐든 몰입을 잘 하는, 그러니까 평소에 ‘집중력이 좋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은 그냥 여러 가지 스킬을 가진 사람인 거야? 몰입이라는 하나의 스킬이 영화 감상, 공부, 글쓰기에 적용되는 게 아니라 영화 감상 몰입 스킬, 공부 몰입 스킬, 글쓰기 몰입 스킬이라는 세 가지 스킬을 가진 셈?

A: 응. 하나의 몰입방법이 다른 영역의 몰입방법에 영향을 줄 수는 있을 것 같긴 하지만.

B: 그 부분이 진짜 중요한 것 같은데. 하나의 몰입방법이 다른 영역의 몰입방법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건
여러 몰입방법들 사이에 교집합이 있을 거라는 뜻이잖아. 그럼 ‘몰입’이라는 집합을 또 쪼개면 더 core한 뭔가가 나올 수 있다는 뜻이고.

A: 그러게. 뭐지. 끈기? 애정? 모르겠다.

B: 영화가 상대적으로 몰입하기 쉬운 이유는, 스토리텔링이기 때문이잖아? 그런데 스토리텔링에 몰입하기 제일 쉬운 건 계속 ‘다음’으로 나아가게 하는 요인을 스토리 자체가 제공하기 때문인 것 같거든. 공부는 다음에 내가 뭘 공부하게 될 지 일반적으로 안 궁금하니까. 그러다가 공부가 일종의 ‘스토리’가 되기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 궁금해지고 잡생각 사라지고 몰입하게 되는 거 아닌가. 그러니까, 몰입에서 제일 중요한 건 next step으로 나아가야 할 이유를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거 아닐까.

A: 그럴듯하네. 몰입을 영어로 하면 flow거든. 칙센트 미하이가 쓴 <몰입의 즐거움> 원제가 Flow였어.

B: 확실히 flow라는 단어가 ‘몰입’의 여러 의미들 중 핵심적인 특성을 잘 끄집어낸 것 같아. 다른 데도 적용 가능한 개념인 것 같고. 예를 들어 브랜드 / 공간 / 상품 이런 것도 전부 다 next step이 있고 없고가 중요할 것 같거든. 그나저나 일반적인 용법에서 flow가 ‘몰입’으로 사용되는 예가 많은 것 같진 않네. 사전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학술어인 것 같아.

A: 그러게. 계속 다음 스텝을 밟아감으로써 하나의 흐름을 형성할 수 있어야 몰입이 가능하니까.

B: 게임이 그렇잖아. 자꾸 퀘스트 주고 다른 몬스터나 맵 갖다주고. 계속 할 걸 만들어 주는 거.

A: 이런 것도 있을 수 있겠네. ‘활동에 명확한 목적이 있고 그 목적에 가까워 진다는 진행감 또는 결과feedback 를 느낄 수 있는 통제감’. 이것도 칙센트 미하이가 한 말이야.

B: 오. 하기야 영화도 결말이 궁금한 게 되게 크잖아.

A: 그렇지. 기대감 같은 거. 클라이막스를 기대하고, 내가 느낄 감정의 궁극을 기대하고, 결말도 기대하고. 어쨌거나 방향성이 있는 거? 쌩뚱맞은 다음 단계를 기대하는 건 아닌 것 같고.

B: 슬슬 정리해 볼까. 지금 챙긴 게 이거 세 개인 것 같은데 말이야.

  1. 몰입하려는 대상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을 제거하기
  2. 자잘하게 쪼개서 지속적으로 next step 제공하기
  3. 비전/목표 등의 기대감 조성하기

A: 응. 그나저나 요새 영화 진짜 비싸구나. 만원이야. 이러저러하게 공짜로만 봐 버릇해서 이렇게 비싼 줄 몰랐네.

B: 그래도 다들 보러 가는 거 보면 너무 놀 줄 모르는 것 같아서 안타까울 때가 있어. 자유 시간을 줘도 떠먹여주는 데만 골라 가는 사회…사실 아저씨들이 룸싸롱 다니는 것도 아저씨들한테 돈이랑 시간 줘봤자 놀 줄 몰라서 그렇다고 봐.

A: 떠먹여주는거 좋아하지.

B: 어떡하면 개개인이 ‘스스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 정부 단위에서의 큰 틀 말고, 개인 단위에서 / 스타트업 단위에서. 역시 동호회인가. 합창 동호회, 밴드 동호회, 그림그리기 동호회, 커피 내리기 동호회, 와인 동호회, 독서토론 동호회 등등등.

A: 뭔가 design thinking 같은 느낌이네.

B: 여러분, 한 달에 ㅇㅇ만원만 내시면 우리가 놀거리도 제공해 드리고 멤버 모아서 팀도 만들어 드려요. 될까?

A: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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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과 몰입 (대화)

영화관과 몰입 (대화)”에 대한 2개의 생각

  1. 김슈미트댓글:

    A?
    B가 내가 아는 사람이라면 ㅇㅅㅂ같고…
    오랜만에 와서 글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이전과는 달라진 느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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