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턴 프리드먼의 ‘자본주의와 자유’를 읽고

‘경제민주화’의 유래

‘경제민주화’가 유행이다. 사실 이 경제민주화는 딱히 새로운 개념도 아니다. 헌법 119조 2항에 떡하니 경제민주화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다음과 같다.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이 조항은 1987년, 9차 개헌 때 삽입되었다. 강산이 두 번 하고 반이나 바뀐 즈음에 와서 다시 ‘경제민주화’가 화두가 된 것이다. 이는 그만큼 우리 사회가 경제적으로 민주적이지 않다는 뜻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경제민주화 = 경제적으로 자유롭게 하다

그런데, ‘경제민주화’가 정확하게 무슨 뜻일까? ‘경제민주화’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경제 활동이 민주적으로 이루어지도록 개혁하는 일. 즉, 자유 경쟁의 장점을 유지하면서 노동 계급을 보호하여 그들의 기본적인 인권을 옹호하는 것.’ 그렇다면 ‘민주적’이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 ‘민주적’이라는 형용사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국민이 모든 결정의 중심에 있는. 또는 그런 것.’ ‘자기의 일을 자기 스스로 결정하는 것’을 두고 우리는 ‘자유’라고 한다. 즉, ‘민주적’이라는 말은 ‘모두가 자유로운 것’을 이야기한다고 봐도 좋을 것이며, ‘경제민주화’는 모두가 경제적으로 자유롭도록 하는 것을 말할 터이다. 경제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애당초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는 없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원하는 모든 것을 구입할 수 있을 정도로 돈이 많을 수는 없다. 설령 있다 한들, 타인의 경제적 자유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침해한다면 그러한 자유의 행사 역시 제한되어야 한다. 결국 자유는 일종의 스펙트럼으로 이해해야 한다(자유에 대한 나의 보다 상세한 입장은 <자유로부터의 도피> 과제에서 ‘자유에 대한 추가적 시각’이라고 제목을 붙인 단락을 읽으면 된다).

경제적 자유의 첫번째 조건; 경제적 평등

그렇다면 거시적인 입장에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한 개인이 ‘경제적으로 자유롭다’라고 여겨질 수 있는 스펙트럼은 어느 정도인가?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가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는 상대적인 격차가 너무 크지 않아야 않다. 자유 역시 어느 정도는 관계적인 가치다. 자신에 비해 상대적으로 무절제한 경제 생활을 무리 없이 유지하는 타인을 보면서 스스로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경제 생활의 상대적인 격차는 납득 가능해야 한다. 나는 자신보다 만 배 더 잘 사는 사람의 생활 수준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소득이 자신의 노력과 능력에 의한 결과라면, 만 배의 소득 격차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만 배나 더 노력했거나 혹은 만 배 더 뛰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설령 그런 케이스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사회 전반적으로 만 배 이상 되는 소득 격차가 흔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고로 혹시 모를 비판에 미리 대응하자면, ‘평등’과 ‘동일’은 엄연히 다른 개념이라는 것을 말해 두고 싶다. 즉, 평등을 외치는 내 주장이 동등을 주장하는 것으로 오인되지는 않았으면 한다는 것이다.

경제적 자유의 두번째 조건; 최소한의 여건

경제민주화의 두 번째 조건은 구성원들이 절대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적 생활을 영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평등하다고 해도, 다 같이 거지같아서는 곤란하다. 그 ‘일정 수준’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상태를 달성한 수준을 가리킨다.

첫째, ‘자유로울 수 있는 최소한의 경제적 생활’이란,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이 되는 상태를 말한다. 여기서 의식주의 해결이란 단순히 굶지 않을 정도의 밥과 춥지 않을 정도의 집과 옷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소박하더라도 최소한의 미적인 요소를 갖출 수 있는 생활은 영위할 수 있어야 한다. 식생활로 따지면, 평소에는 오천 원짜리 밥을 사먹더라도 한 달에 한 번 파스타, 삼겹살, 인도 카레 정도는 먹을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 의생활로 따지면, 유니클로나 지오다노에서 옷을 사 입을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사실 요새는 유니클로나 지오다노의 가격도 많이 올라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조심스럽다).

둘째, 최소한의 문화적인 생활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노인과 바다>를 읽고, 아니쉬 카푸어 전을 보고, 서울시향이 연주하는 교향곡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가 특히 부족한 것이 이 부분이다. 교육과 제도 등 많은 것이 지금과는 상당히 달라지지 않으면 개선하기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두 번째 상태가 아무리 뒤떨어져 있다고 해도, 마지막 세 번째만큼은 아니다. 세 번째는 바로 ‘시간’이다. 경제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 자체가 우리 사회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물론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돈이 있으면 뭘 하나. 더 적게 일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엄청난 것을 의미한다. 더 ‘적게’ 일해야 하고, 더 적게 ‘일해야’ 한다. 즉, 일을 하긴 하되, 그래서 돈을 벌긴 벌되, 조금 더 시간적인 여유가 확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민주화에 대한 새 정부의 태도

즉, ‘경제적으로 민주적인 사회’는,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적 풍요를 비교적 평등하게 누리는 사회’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정치, 문화, 윤리, 법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이해 및 고려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세상 모든 일의 근본은 결국 경제다’라는 식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지만, 경제가 여타 다른 영향과 막대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벌 소유구조에 대한 개편을 최우선 과제로 삼지 않았다고 하여 ‘경제민주화’에 대한 의지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재벌 소유구조 개편이 중요하지 않은 과제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경제의 민주화를 위해서는 정말로 많은 것이 요구되며, 그 우선순위는 견해에 따라 충분히 갈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오직 당선을 위해서만 ‘경제민주화’를 외쳐놓고 그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지 않은 건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경제민주화 부문에서는 아직까지 경제민주화를 말로만 외쳤다고 할 수 있을 만한 모습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선거 직전, 아무도 모르게 공약집에서 당선인이 제시한 다양한 경제민주화 관련 정책들을 변형 혹은 누락시킨 것이 의심할 만한 거리라면 거리일 수는 있겠다. 이에 대해 인수위 관계자는 ‘공약집에 없어도 박 당선인이 언급한 적이 있다면 최대한 실현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해명했다고 한다. 지켜볼 일이다.

뜨거운 감자; 중소기업 위주의 경제 구조

‘경제민주화’를 위해 현 정부가 가장 활발하게 논의하고 있는 것은 중소기업 위주로 경제 구조를 전환하는 것이다. 전체 노동 가능 인구 중 88%가 중소기업에 종사하는 현실에서 중소기업에 주목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대기업의 이른바 ‘단가 후려치기’ 등과 같은 불공정 행위에 대한 엄격한 제도적 조치가 반드시 마련되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효율성이 낮은 기업은 시장에서 퇴출될 수 있어야 한다. 다만 비효율적 기업의 시장 퇴출이 사회적으로 비극이 되지 않으려면, 실업 급여 문제는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이를 위한 증세 역시 필수적이다. 시장과 정부 개입이 이런 식으로 조합된 모델은 여러 버전이 있지만, 그 중에서 오늘날의 스웨덴을 있게 한 ‘렌-마이드너 모델’은 적어도 지금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구체적인 모델 중에서는 가장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정부개입을 혐오하는 프리드먼에 대한 비판

이는 프리드먼이 펄쩍 뛸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프리드먼 자신이 인정했다시피, 어차피 완벽하게 자유로운 경쟁 시장이라는 것은 존재할수도 없을뿐더러, 있다고 하더라도 바람직하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어느 정도로 정부가 개입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일이다. 그런데 자기 입으로도 불가능하거나 심지어는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해놓고 무조건적으로 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일관성이 없어 보인다. 이 외에도 프리드먼의 주장 및 논리에 대해, 이를 반박할 만한 근거는 많다. 그렇지만 딱히 나만의 참신할 생각이 아닐뿐더러, 그냥 읽고 동의한 뒤 외운 걸 그대로 반복할 뿐인 것 같아 생략하겠다. 당장 우리가 함께 읽은 <자본주의 4.0>만 해도, 프리드먼 식의 주장을 최신 사례를 들어가며 조목조목 잘 반박하고 있다.

큰 이야기를 할 때에는 ‘대략적으로’

이번 글을 전반적으로 지나치게 모호하게 썼다는 느낌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나름 변명을 하자면, 나는 이런 식의 표현 및 의사 전달 방법이 보다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사회 전반에 걸친, 거시적이고 대규모적인 담론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는 아주 정밀하고 세밀하고 명료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설령 가능하더라도, 그것은 바람직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언제 어디에서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완벽하게 적용될 수 있는 어떤 것을 확고하게 주장하는 것은 그 주장이 내포하고 있는 장점을 흐리게 할 정도의 폭력성을 띄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래서 사회 전반에 걸친 이야기를 할 때는 진리를 ‘대략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이야기했다. 정밀성이라는 것은 주제의 본바탕에서 벗어나지 않을 정도만 되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프리드먼 비판; 한치의 오차 없는 이론이라는 치명적 유혹

나는 많은 경제학자들이 현실과는 따로 노는 이야기들을 하는 경우가 많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지나치게 정밀하고 세밀하게 자신의 이론을 다듬는 것에 몰두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계량경제학자들이 그렇다. 그리고 프리드먼의 글을 읽을 때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일군의 사안들에 대해 일괄적으로 일반적 준칙을 채택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 정면으로 대치된다. 문제는 이것이 프리드먼 자신의 말과도 모순된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이 내놓은 특정한 제안이 석판에라도 새겨 영원히 모셔두어야 할 철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다만 ‘현재 그가 가진 지식에 비추어볼 때 그것이 합리적인 수준에서 안정을 이룩할 가능성이 가장 큰 준칙’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어서 ‘우리가 그 준칙을 시험해보고, 더 많이 배워 가면서 훨씬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훨씬 더 나은 준칙을 생각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도 했다. 이러한 태도는 칼레츠키가 제시한 ‘자본주의 4.0’에 부합하는 태도다. 프리드먼의 자가당착은 한치의 오류도 없는 논리와 이론의 미학의 달콤한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일괄적으로 적용되는 일반적인 준칙’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어렵다는 것을 프리드먼과 같은 사람이 인식하지 못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참고로, 내가 프리드먼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밝혀야겠다. 글 곳곳에서 밝혔듯이, 아니 평소 나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쉽게 짐작할 수 있겠지만, 나는 프리드먼의 핵심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프리드먼을 싫어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것은 거절하고 싶다. 설령 나와 특정 이슈, 심지어는 사회 전반에 걸친 태도에서 그 궤를 같이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프리드먼보다 싫을 수 있다. 그건 반대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판별하는 기준은 그 사람이 어떠한 생각을 했는지 보다는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여야 한다. 암튼 난 프리드먼 안 싫어.

몇 가지 단상

  • 이 책을 번역한 사람들이 법조인이라는 점이 흥미로웠다. 그런데 번역이 좀 매끄럽지 않았던 것 같다. 프리드먼의 문장이 원래 이렇게 난해한 것인지, 아니면 번역을 서투르게 한 건지는 모르겠다.
  • 프리드먼의 글은 대개라는 부사를 사용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거의 모든 부분부분이 두괄식이다.
  • 밀턴 프리드먼은 동아시아의 네 마리 용의 시장지향적 정책이 극적인 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이 제3세계의 개발을 위해서는 중앙집중적 계획과 막대한 대외 원조가 필요하다는 학설을 반박하는 사례라고 주장했지만, 이 사례는 오히려 그 반대의 역할을 하지 않나 싶다. 우리나라의 성공은 대표적인 중앙집권식 계획경제의 성공 사례가 아닌가.
  • 프리드먼이 ‘구제불능의 집산주의자’라고 강력하게 비판한 Leon Keyserling은 트루먼 정부의 경제정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매우 유능하게 그 역할을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혹시나 해서 인터넷을 좀 찾아 보니까, 프리드먼은 꽤 감정적인 사람이었던 듯싶다. 자신과 논쟁이 있었던 사람을 대놓고 엄청 싫어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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