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읽고

들어가며

두서 없이 책을 읽으며 느낀 점을 주욱 나열한 글이다. <3차 산업 혁명>을 읽고 나서 쓴 글과 비슷한 형식인데, 이번엔 부분 부분을 단칼에 자른다기보다는 나름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이어 보았다. 그래도 하나의 통일된 흐름이 없는 글인 건 맞다..

권리로서의 가치, 의무로서의 가치, 가치로서의 자유

모든 권리에는 의무가 따른다. 의무 없이는 온전한 권리를 누릴 수 없고, 권리 없는 의무는 공허한 폭력일 뿐이다. 결국 권리가 곧 의무고, 의무가 곧 권리다. 그렇기 때문에 때에 따라서는 권리와 의무를 굳이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권리 혹은 의무가 본질적이며 인간의 충만하고 의미 있는 삶에 핵심적인 역할을 할수록 그렇다. 이렇게 권리와 의무로 구분되기 이전의 것을 우리는 가치라고 한다. 행복이라는 가치, 사랑이라는 가치, 정의라는 가치, 그리고 자유라는 가치 등. 즉, 자유라는 단어 하나에는 자유로울 권리와 자유로울 의무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를 논할 때 어느 하나만을 따로 떼어 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프롬은 이 자유라는 가치를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로 나눴다. 그는 근대인의 정신적 빈곤의 원인은 근대인에게 있어 자유가 소극적 자유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프롬이 제시한 것이 이른바 적극적 자유다. 프롬에게 있어 적극적 자유란 근대인이 추구해야 할 자유의 미래다(안타깝게도 근대가 어느덧 과거를 뜻하게 된 현대에도 프롬의 근대 사회에 대한 지적은 지극히 유효하다). 그러나 문제는 프롬이 제시한 이 적극적 자유라는 개념이 다소 모호하게 읽힌다는 것이다. 뜬구름 잡듯이 좋은 얘기만 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면 너무 과격한 표현일까. 어쨌든 프롬은 주체적으로, 비판적으로 사고할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권리와 의무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 이유는, 이 이야기가 프롬의 적극적 자유를 추구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해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프롬이 말하는 소극적 자유는 의무로서의 자유가 결여된, 절름발이 자유로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적극적 자유를 추구하는 태도란 우리가 자유라는 권리를 누리는 데 있어서 짊어진 의무를 생각하는 태도를 말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진정한 자유란, 자유롭기 위해 우리가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여야 할 주체적이고 비판적인 사고 및 행동 뒤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가 된다. 이렇게 보면, 진정으로 자유라는 가치를 추구하고, 누리는 것이 조금은 쉬워 보인다. 더 쉽게 여겨지도록 이번에는 행복이라는 가치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한번 접근해 보자. 만약 행복이라는 가치를 일종의 권리로서만 바라본다면,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행복은 행복할 만한 여건이 되었을 때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법적인 자유가 확보되면 정치적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과 비슷하다. 그러나 법적으로 투표권 생기고 정당한 절차 없이 구속되지 않게 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모두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것이 아니듯, 특정한 상황 자체를 행복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행복은 우리 곁에 존재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번엔 이렇게 생각해 보기로 한다. ‘우리는 행복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따라서 행복해하자. 이렇기 때문에 행복하다거나, 행복하려면 이래야 한다는 게 아니라, 행복해야 하기 때문에 행복하기 위해서 노력을 해 보자.’ 그러면 생각보다 행복이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정말이다(내가 경험자여). 해야 하는 것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내가 자유롭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덕목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오독 혹은 악용에 대한 우려, 비판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읽으면서 마냥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가장 우려스러웠던 점은, 어떤 가치에 대해 절름발이의 오류를 범하는 데 있어 권리만을 강조하는 유형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권리는 생각지 않고 의무만을 강조할 때도 우리의 가치는 절름발이가 된다. 프롬은 전자만을 지적했지만, 후자의 오류도 얼마든지 발생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놓인 처지에 따라 두 가지 유형의 오류를 다 범한다. 같은 가치에 대해서라도 말이다. 자신이 가치를 추구하는 쪽이라면 권리만을 강조하고, 자신이 타인에게 특정한 가치를 요구하는 쪽이라면 사람들은 의무만을 강조하는 오류를 저지르곤 한다. 결국 자신한테는 관대하고 남들한테는 엄격하다는 거다. 기도 열심히 하면 병 낫는다고 해 놓고, 막상 병이 안 나으면 믿음이 부족한 탓으로 돌리는 식이다. 프롬의 주장 역시 후자의 오류로서 기능할 여지가 있다. 사회에 만연한 부자유의 원인을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리는 이론적 근거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프롬의 텍스트는 이미 소극적 자유가 확보된 상태에서, 적극적으로 자아를 발현하지 못한 것은 나약하고 신경증적인 개인의 잘못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2012년의 한국 사회는 프롬이 반 세기도 더 지난 과거에 어느 정도 확보되었다고 말한 소극적 자유조차도 제대로 뿌리내린 것 같지 않아 보인다. 2011년 국경없는 기자회가 발표한 세계 언론 자유 순위에서 한국은 44위를 기록했다. 불과 씹팔년 전까지만 해도 인종 차별이 합법이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물론이고,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보츠와나보다도 순위가 낮다. 심지어 3년 전인 2009년에는 69위를 기록했었다. 자유 중 으뜸이라는 표현의 자유조차 제대로 확보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으로부터의 자유’는 적어도 우리들에게는 아직까지도 매우 유효한 자유의 척도다. 혹시나 해서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이 문단은 프롬의 텍스트가 오독 혹은 악용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이지, 프롬이 이러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이왕 <자유로부터의 도피>의 위험성(?)을 언급한 김에, 책을 읽으면서 불편했던 부분 몇 가지를 추가적으로 짚어 볼까 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심리학에 대한 그의 태도다. 나는 인간의 심리라는 아주 복잡한 대상을 프로이트처럼 몇 가지 동인으로 환원해서 설명하려는 태도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럴 듯한 논리는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 프로이트처럼 리비도와 파괴적 충동으로 인간의 거의 모든 행동과 심리, 성향을 분석하려 들면 사실 못할 것도 없다. 그렇지만 문제는 과연 그것이 참이냐는 것이다. 그것이 전부냐는 것이다. 프롬은 프로이트처럼 과격한 논리를 펼치지는 않지만, 인간의 근원적 외로움과 고독을 지나치게 강조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물론 나 역시 죽음에 대한 공포, 유한함에 대한 절망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이 정도로 거대한 담론을 논하면서 ‘이러한 시각 또는 분석도 있을 수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이것이다’라고 단정적이고 확고한 태도를 보이는 것에는 반대다. 프롬 스스로가 말했듯 정확한 문제 인식은 문제 해결을 위해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렇게 현상을 단선적으로 인식하는 태도는 현상에 대한 어긋난 인식에 도달하는 가장 쉬운 길이 될 여지가 많다. 게다가 그가 근거로 내세운 여러 실험들은 사실 그의 주장을 합리적으로 뒷받침해줄 수 있는 결과들이 아니다. 이러한 결과들은 상관관계만을 입증했을 뿐이다. 인과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사회를 개인의 단순 합으로만 인식하는 것 같은 태도에도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 사회는 대표적인 복잡계다. 복잡계는 구성요소들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완벽하게 설명되지 않는 시스템을 말한다. 복잡계 내부에서 각 행위자는 상호작용하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은 종합적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이러한 종합적인 행동은 비선형적이어서 개별 요소들의 행동을 단순히 합해서는 유도해낼 수 없다. 물론 프롬이 개인의 심리를 분석하는 과정에 있어서 그 개인이 사회를 비롯한 외부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는가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자신이 책에서 명시했듯, 그는 기본적으로 개인에 대한 미시적 분석에 집중하면 거시적 분석의 핵심적인 단초가 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상호작용에 대한 언급 없이 사회를 인식하려는 것은 당신과 나의 만남과 대화, 그리고 사랑을 빼놓은 채 우리의 삶을 논하는 것과 같다.(^^)

지식인으로서 바람직한 프롬의 태도

여기까지 오면서 프롬 칭찬을 한 번도 안 한 것 같은데, 사실 나는 프롬을 굉장히 좋아한다. 아직 수백 개밖에 되지 않은 트윗 중 프롬을 인용한 것만 서너 개는 될 것이다. 이론적으로 다소 엄밀함이 부족하고 일관성이 떨어지는 면은 있지만, 나는 그가 인간에 대한 열정 어린 애정, 그리고 애정 어린 지성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점을 높이 산다.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도 보다 나은 사회에 대한 그의 열망은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특히 연구의 스케일과 내적으로 보다 완전한 논리적 구조를 포기하고서라도 다소 서둘러 책을 펴낸 이유를 설명한 부분은 무척 감동적이었다. “완벽함에 대한 소망을 희생할 수밖에 없다 해도 현재의 위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지체 없이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롬의 태도는 자유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지적 못지않게 독자들에게, 특히 앞으로의 창창한 미래를 설계하려는 젊은 독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유에 대한 추가적 시각

정작 이 책의 핵심 화두인 자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지는 않은 것 같아, 자유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참 글 흐름이 가관이다.. 어쨌든, 과연 자유란 무엇일까?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자유인가? 그렇다면 엄밀히 따져서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닌가? 이 세상에 모든 걸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일단은 인간인 이상 누구나 죽기 싫을 텐데, 누구나 죽지 않나. 그러면 자유는 특정한 정도라기보다는 일정한 스펙트럼으로 판단해야 하는 것일까? 그러니까, 이 정도 구속에서 저 정도 구속까지의 범위는 자유로 인정할 수 있고, 그것보다 심하면 방종이고 부족하면 구속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어쨌든 엄밀히 말해서 완전하게 자유로운 인간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자유라기보다는 자율일지도 모른다. 자율은 어떤 개인이 의식적으로 자신이 간섭 혹은 구속을 받는다고 느끼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즉, 자신이 스스로 자유롭다고 느낀다면 그 사람은 자율적인 것이다. 어떤 사람이 집에서 고양이를 키운다고 치자. 우리는 모두 고양이가 길러지기 때문에 자유롭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작 고양이는 이상하게 생긴 게 때 되면 밥 주고 추울 때 잘 수 있는 곳 내 주니까 기분 좋게 거기 머물러주는 것뿐일지도 모른다(물론 고양이가 답답해할 만큼 창문 하나 없는 좁은 단칸방은 아니어야 하겠지만). 나는 이러한 상황에서는 고양이를 자율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인간은 고양이보다 인식의 폭이 넓기 때문에, 원하는 자유의 폭도 고양이보다 훨씬 넓을 것이다. 어쨌건,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구속이 있다면 그것은 자율성을 침해한다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이 자율적이기만 하면 되는 것인지, 아니면 진정 자유로운 경지를 꿈꿔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게 된다. 나는 자유가 원하자면 끝도 없고 그 끝은 절대로 성취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차피 자유보다는 자율에 초점을 두고 논의를 펼쳐나갈 수밖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지금 매트릭스에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면, 매트릭스에서 사는 것이 문제될 것은 없지 않겠는가? 다만 우리가 지금 매트릭스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우리는 부자유스러울 뿐만 아니라 자율적이기도 못하게 될 뿐이다. 이와 유사한 시각으로 자유의 세 번째 유형을 제안한 학자가 바로 필립 페팃이다. 필립 페팃은 이른바 비지배 자유라는 개념을 제시했는데, 관심이 있으면 곽준혁 교수가 옮기거나 쓴 공화주의 관련 서적들을 읽어 보시라.

나오며

푸코가 프롬을 읽었는지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감시와 처벌>보다 대략 30여 년 먼저 출판된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는 <감시와 처벌>의 주요 아이디어와 비슷한 생각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권위가 보다 은밀한 형태로 기능하게 되었다는 것, 이른바 사회의 ‘정상성’이라는 것들 속에는 체제의 논리가 숨어 있다는 것, 그리고 대상의 본질을 인식하는 데에는 대상의 역사를 훑어 보는 것 만한 것이 없다는 것까지, 새삼 사람은 거인의 어깨에 올라 세상을 본다는 뉴턴의 말이 실감난다. 내가 보는 세상 역시 마찬가지일 터. 다음에 내 어깨를 딛고 올라갈 이들이 볼 세상은 지금보다 더 자유롭고, 지금보다 더 아름다웠으면 좋겠다.

p.s.

자유를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로 구분한 것은 이사야 벌린이다. 1958년도에 쓰여진 <Two Concepts of Liberty>를 읽어 보시라. 우리말로는 <자유론>으로 번역된 걸로 알고 있다. 국적은 영국이었나 그럴 건데, 이 사람도 유대인이다. 프롬도 유대인이다. 좀 똑똑하다 싶으면 죄다 유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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