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관성 있는 사람, 답답한 사람

내가 생각하는 일관성이란 ‘끊임없이 같은 곳을 지향하는 것’이다. 계속해서 같은 말을 하고,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은 일관성이 아니다.

계속 같은 곳을 바라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다듬고, 나침판을 점검하고, 주위를 둘러보아야 한다. 목적을 바꾸지 않기 위해서라도, 수단은 끊임없이 바뀌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엔 상황에 맞게 목적을 바꾸게 된다.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일관성이란 목적에서의 일관성이다. 수단에서 일관성을 발휘하려 들면, 답답해지기 쉽다.

역사를 돌아보면, 위대한 성취를 일구어낸 사람들 중엔 ‘변덕쟁이’라고 불린 사람들이 꽤 많다. 그렇지만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사람이 일관된 사람일까, 아니면 저울이 왼쪽으로 기울든 오른쪽으로 기울든 항상 왼쪽에만 우두커니 머물러 있는 사람이 일관된 사람일까.

지금 있는 곳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일관성’이라는 단어를 쓰는 건 비겁한 일일수도 있쒑!

“사람은 자칫 목적과 수단을 쉽게 착각하기 때문에 수단이 목적이 되어 버리는 경우를 흔히 찾아볼 수 있다. (…) 사람들이 수단과 목적을 착각하는 이유는 그쪽이 편하기 때문이다. 행복이 목적이라고 하지만 그 행복이 무엇인지에 관해 지속적으로 자문하고 고민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다. 그래서 무의식중에 간단히 그 크기를 측정할 수 있는 금전 쪽으로 목적을 바꾸어 버리는 것이다.” – <지적자본론> 중

일관성 있는 사람, 답답한 사람

시너지

상관 없어 보이던 것들이 한데 묶여 어마어마한 시너지가 날 때가 있다. 전화기랑 컴퓨터를 합쳐 놓은 아이폰이 그랬고, 레코드 상점과 서점을 합쳐 놓은 츠타야 서점이 그랬다.

서로 엉켜붙어 있는 걸 떼어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서로 전혀 다른 메커니즘으로 돌아가던 두 맥락을 자연스럽게 이어붙이는 건 그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사람도 그렇지 않나. 헤어지는 건 한순간이지만 새로운 인연을 굳건하게 다져나간다는 건 졸라 어렵다.

낯선 것들과 부대낀다는 건 확실히 피곤한 일이다. 그렇지만 그로 인해 얻게 되는 건 미지의 영역에 있다. 거부감은 당연한 거고, 반발은 자연스러운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시너지를 내야 한다는 생각은 언제나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도 언제나 하고 있어야 한다. 성취의 유통기한이 갈수록 짧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제의 승리가 오늘의 태만함의 재료가 되면, 내일의 생존은 장담할 수 없다.

제국은 언제나 변방에서 탄생했다. 신선함은 밖에서부터 온다. 끊임없이 호기심을 가지고 주변을 둘러봐야 한다. 그러다 매력적인 파트너를 발견하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각오로 빡세게 붙어야 한다.

어려운 일이겠지만, 좋은 건 거의 항상 어렵다. 좋은 건 비싸다. 어영부영 어떻게든 그럭저럭 흘러가는 거야 어렵지 않겠지만, ‘자립으로서의 자유’는 갈수록 냉엄한 단어가 되어가고 있다.

내게 시너지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던 둘이 한 곳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시너지를 내려면 다른 줄 알았던 이해관계의 교집합을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교집함이라 함은, 이미 존재하던 이해관계여야 한다는 뜻이다. 좋은 의미에서의 새로움은 ‘새롭게 보기’에 가깝다. 맨날 보던 그 풍경을 신선하게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해 준다는 뜻이다. 전에 없던 것을 들이댈 때, 우리는 그것을 새로움이라고 하지 않고 ‘특이하다’고 한다. 사람들은 특이한 것을 오래 좋아해주지 않는다.

헤헤 쑥씨럽긴 하지만, 트레바리는 지성(교육)과 사랑(커뮤니티)의 시너지를 꿈꾸는 회사다. 그런데 지성이 ‘더 많이 아는 것’이고, 사랑이 ‘서로에게 특별히 여겨지는 것’이라면 사실 둘 사이의 접점은 찾기 어렵다.

지성을 ‘더 현명해지는 것’, 사랑을 ‘상대를 위하는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래서 상대를 더 잘 위하기 위해 더 현명해지고 싶은 마음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리고 그러한 마음이 더 좋은 세상과 더 좋은 삶으로 이어질 거라고 함께 믿게될 수 있다면, 우리는 아마도 꽤나 뿌듯하게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할 수 있게될 거라고 생각한다.

시너지

좋은 교육

공부는 혼자서 하기 어렵다. 정보가 부족할 수도 있고, 노하우가 부족할 수도 있고, 의지가 부족할 수도 있다. 좋은 교육은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노하우를 나누고, 의지를 북돋아줄 수 있어야 한다.

예전에는 정보가 부족했다. 그래서 정보 전달이 중요했다. 그렇지만 요즘은 정보가 넘친다. 너무 넘친다. 넘치는 만큼 잘못된 정보도, 편향된 정보도 많다. 그래서 이제 교육은 정보를 전달할 필요가 없게 된 대신, 정보를 고르는 안목을 키워줘야 하게 됐다.

좋은 정보를 고른다고 좋은 생각을 하게 되는 건 아니다. 좋은 재료가 반드시 좋은 요리로 이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교육은 좋은 정보를 고르는 방법뿐만 아니라 정보를 잘 소화할 수 있게끔 도와주기도 해야 한다.

정보를 소화한다는 것은 자신만의 답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세상을 대하는 자신만의 태도를 가진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덕목이다. 어느 정도 정답이 정해진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모두 함께 한 마음 한 뜻으로 같은 곳으로 바라보고 같은 방식으로 달릴 때 오히려 미래가 밝은 시대를 살았다.

그렇지만 이제는 아니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사회든 다양한 백그라운드를 가질 수록 경쟁력이 강하다고 여겨지는 시대가 됐다. 끊임없이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는 답을 찾을 수 없다. 답은 만드는 게 됐다.

그렇지만 아직도 많은 교육 현장에선 정보를 직접 골라준다. 정답도 정해준다. 그래서 학생들은 골라준 정보를 착실하게 익히는 기술을 배운다. 그런데 실제로 학교를 졸업하면, 그 누구도 정보를 골라주지 않는다. 그래서 익히고 싶어도 익힐 대상이 없어서 당황하게 된다. ‘정확하게 제가 뭘 해야 하는지 시키기만 하시라니깐요’라고 얘기해 봤자, 학교 바깥에서 그런 친절함을 보여줄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조직은 몇 군데 없다.

사람들이 공무원을 하고 싶어하고 대기업에 지원자가 들끓는 이유는 반드시 정부와 대기업이 더 안정적이어서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배운 걸 써먹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조직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정답이 이미 존재하는 곳에서 자란 이들에게 ‘저마다의 답을 만들어내야 하는 곳’은 두려울 수밖에 없다.

좋은 교육

‘지적자본론’을 읽고

김아름님이 추천해 주신 <지적자본론>을 읽고 끄적인 글 두 개. 아름님 좋은 책 추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헤헿!


 

#‎실패‬ ‪#‎바텀라인‬

“실패만으로는 배울 수 없습니다. 성공을 해 봐야 배울 수 있지요.”

실패에서 배워야 할 건 사실 그렇게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특히 ‘아, 이렇게 하면 실패하는구나’ 식의 레슨은 함부로 배우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어제 누군가에게 실패를 안겨준 바로 그것 때문에 내일 성공하게 될 사람들이 숱할 것이기 때문이다.

실패에 익숙한 사람들이 엄한 데서 까탈스러운 모습을 많이 본다. 과거 실패한 경험의 산물이고, 안타깝게도 그 다음 실패의 징검다리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실패에서 배워야 할 건, ‘바텀라인의 확보’다. 추락하다 보면, 이따금 내가 어디까지 내려가도 괜찮은지, 우리가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다. 개인 혹은 조직이 데미지를 인식하는 역치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이 바텀라인은 우리를 과감하게 만들어 준다. ‘망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은 너무 많은 가능성을 놓치게 한다. ‘이게 잘 안 되더라도, 우리는 힘들지 않을 수 있어’라는 생각처럼 도전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생각은 없다.

바텀라인은 우리를 침착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요즘 같은 시대에 과감함은 성공의 필수조건 중 하나지만, 조급함은 실패의 단골조건 중 하나다. 과감하게 하면 도전이지만, 조급하게 하면 도박이 된다. 바텀라인을 확보하지 않은 채 조급하지 않은 침착함을 보여주는 사람 또는 조직을 나는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조금 세게 말하면, 나는 이러한 ‘바텀라인의 확보’가 우리가 실패에서 배울 수 있는, 혹은 배워도 괜찮은 거의 유일한 레슨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 이상한 것만 배우게 되더라.

사실 실패는 안 할수 있으면 안 하는 게 더 좋다. 특히 과정으로서의 실패가 아니라 결과로서의 실패라면 더더욱. 꼭 실패를 겪어봐야지만 바텀라인을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따지고 보면 바텀라인을 확인하는 것도 실패보단 성공에서 나오는 레슨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하다. 버티기 혹은 극복의 성공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러니까 실패하지 말자. 작은 성공이라도 좋으니, 성공을 하고, 성공을 통해 성장을 하고, 성장을 통해 조금 더 큰 성공을 하자. 힝 제발ㅜㅜ


 

#‎현장‬

“사무실에 앉아있는 시간보다 ‘다이칸야마 츠타야서점’ 내부를 돌아다니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그 시간을 줄이고 사장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을 늘린다면 사장 자리를 계속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 데이터베이스의 이노베이션이란, 지적자본의 오픈 리소스화다.”

책상에선 아무래도 더 크게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전반적으로 맞는 말을 하기에는 책상 앞이 더 적절하다.

다만 책상 앞에만 있으면, 우리가 얼마나 니치한지를 놓칠 수가 있다. 100명 중 90명을 만족시킬 수 있는 아이디어가 나오더라도, 우리의 고객이 다른 10명에 해당한다면, 그 아이디어는 실패한 아이디어다.

현장에 가면, 눈 앞에 있는 디테일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어떤 니즈가 어떻게 충족되고 있는지를 보기에는 현장이 최고다.

그렇지만 현장에만 집중하다 보면, 매몰되기 쉽다. 특히 지금 존재하는 현장에만 집중할 때 더 그렇다.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10명은 세상의 전부가 아니다.

큰 꿈을 꾼다면, 아직 존재하지 않는 현장이나 우리와는 다르게 돌아가는 현장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모은 여러 현장들에 대한 인사이트를 묶고 쪼개서 새로운 현장을 만들어내는 건 책상의 몫이다.

책상과 현장의 유기적인 연계는 모든 조직이 꾸는 꿈 같은 거다. 위 인용구처럼, 그 실마리는 현장의 인사이트를 끊임없이 데이터화하는 끈기, 각기 다른 포맷의 데이터들을 하나의 언어로 기어이 표현해 내고야 마는 집요함, 그리고 현장 경험을 게을리하지 않는 리더에 있다고 생각한다.


 

#‎인상깊었던구절‬

“나는 지난 30년 동안 츠타야의 상품이 DVD나 CD, 또는 책이나 잡지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눈에 보이는 그런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각 상품의 내면에 표현되어 있는 라이프 스타일을 고객에게 제공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상품이라고 생각해 왔다. (…) 고객에게 가치가 있는 것은 서적이라는 물건이 아니라 그 안에 풍부하게 들어 있는 제안이다. 따라서 그 서적에 쓰여 있는 제안을 판매해야 한다.”

“자유롭게 존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렵고 힘들다. 관리받는 쪽이 훨씬 편하다. 그래서 부지불식간에 자신의 자유를 내던지고 관리받는 길을 선택하려 하는데, 그런 사원들에게 진정한 능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나는 자유를 요구한다. (…) 자유는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둔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순한 방종과 자유는 결정적으로 다른 위치에 존재한다. (…) 자신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행위는 당연하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자유가 냉엄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런 의미에서다. 하지만 자신의 꿈에 다가가려면 자유로워져야 할 필요가 있다. 아니, 반드시 자유로워져야 한다. (…) 묵묵히 일만 해서는 10년 후, 30년 후, 50년 후까지 존속할 수 없다. 사원들 각자가 ‘산고’를 겪지 않으면 미래를 열 수 없다. (…)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사명감이 필요하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해 두고 싶다. 단순히,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해야 할 일을 한다는 것이 자유다. (…) 자유를 입에 담기는 간단하지만 지속적으로 자유를 유지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것을 관철하려면 사명감이 필요하다.”

‘지적자본론’을 읽고

커피를 하루 세잔 이상 마시면 가슴이 작아진다?

커피를 하루 세잔 이상 마시면 가슴이 작아진다?

찾아보니 2008년 스웨덴의 한 연구진이 영국의 암 관련 학술지(British Journal of Cancer)에 발표한 논문이 시작이다. (이 학술지는 돈을 내야지 볼 수 있게 해놔서 논문을 직접 볼 수는 없다.)

이 논문이 발표되자마자 언론들은 열심히 기사들을 써댔는데, 대충 이런 식이다. ‘커피 너무 많이 마시면 가슴 작아져’ ‘커피를 마실 것인가, 가슴을 지킬 것인가’ ‘커피 컵과 브라 컵 중에 선택하세요’.

그런데 문제는 기사들이 논문을 왜곡했을 뿐만 아니라, 논문 자체도 별로 신뢰할 만한 방법으로 연구되지 않은 것 같다는 것이다. 간단하게 세 가지 이유만 들면:

1. 논문에서 가슴 사이즈를 측정하는 방법이 잘못됐다. 단순하게 ‘면적X높이/3’으로 계산했다고 한다. 무슨 원뿔 부피 구하는 공식도 아니고…

2. CYP1A2*1F 유전자가 없는 사람들의 경우, 오히려 커피를 많이 마시는 사람들의 가슴 사이즈가 아주 조금 더 컸다. 물론 통계적 오차범위 내에서의 차이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참고로 CYP1A2*1F는 유방암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알려진 유전자. 가족력이 있다면 이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다.

3. CYP1A2*1F 유전자 보유자의 경우라 하더라도, 이 연구결과는 어디까지나 상관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뿐, 인과관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심지어 시간차를 두고 실험을 한 것도 아니다. 커피를 많이 마시도록 한 다음 가슴 사이즈를 측정한 게 아니라, 그냥 불러다 놓고 하루에 커피 몇 잔 마시는지 물어보고 가슴 사이즈 재고 돌려보냈다는 뜻.

참고로 이 연구 결과를 한국 언론이 주목하기 시작한 건 3년 후인 2011년 정도부터인 듯하다. 그 후로 꾸준히 기사로부터, 블로그로부터, 각종 커뮤니티 사이트로부터 ‘하루 세잔 커피는 당신의 가슴을 작게 만듭니다’ 식의 글들이 나오고 있다.

아무튼 ‘커피를 마시면 가슴 사이즈가 작아진다’는 이야기는 아직 아무 근거도 없는 낭설이라고 봐야 한다.

이런 식으로 근거 없는 정보들이 돌아다니고, 사람들이 이걸 믿고, 그래서 어처구니없는 데 사회적 비용이 지출되는 걸 볼 때마다 으앙 이건 정말 댓츠 노노다. 그런 의미에서 황승식님과 함께하는 트레바리 넘버스의 갈 길이 참 멀다. 범람하는 정보들을 합리적으로 가려내는 역량을 키우는 일이니. 정혜승님과 함께하는 트레바리 뉴미디어에서도 할 일이 많다. 언론만 바로서도 쓸데없는 소식의 반은 줄어들테니.

커피를 하루 세잔 이상 마시면 가슴이 작아진다?

응팔 5화에서 보라 혼내는 동일을 보며

 

이 장면을 보면서 ‘그럼 보라는 누가 응원해 주나’라는 생각을 했다. 외로울 것 같았다. 무섭기도 했을 거고.

외로움과 두려움이 오래 지속되다 보면, 독해지고 왜곡되기 쉽다. 이상한 아줌마 아저씨들이 다 옛날부터 계속 이상했던 건 아니다.

물론 그 시절 보라에겐 많은 동지들이 있었을 거다. 드라마에서 나온 것처럼 ‘개나소나 데모’하던 시대였으니까. 오히려 외로웠던 건 부모였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부모가 사랑해 마잖는 딸이 최루탄 날라다니는 데모 현장에서 뛰어댕기길 바라겠는가.

그러나 이렇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힘들게 했던 수많은 성보라들이 아니었으면,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이렇게 새삼스럽고 너무 당연해서 촌스럽기까지 한 시대는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요즘엔 살짝 시계가 거꾸로 가는 것 같긴 하지만…)

아무튼,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은 사람은 외롭고, 서운하고, 미안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원래 좋은 건 비싸다. 멋진 건 어렵다. 귀한 건 동떨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꿈을 꾸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을 찾아야 한다. 찾아서 함께해야 한다. 그래야 덜 외로울 수 있다. 그래야 마음 속에 한가닥 여유를 챙길 수 있다. 그래야 나를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내가 꾸는 꿈 때문에 힘들어하는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을 이해하고 보듬어줄 수 있다.

급변하는 세상이다. 그래서 모두가 모두를 외롭게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한 세상이다. 꿈을 꾸는 사람들이 외롭지 않도록, 서로 함께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의 위로가 되도록, 트레바리가 무엇인가 할 수 있길 바란다.

* 엄청 늦은 뒷북이지만 시간 날 때마다 응팔을 한 화씩 챙겨 보고 있는 중인데 재밌다ㅜㅜ5화까지 봤는데 세번울음ㅋㅋ

응팔 5화에서 보라 혼내는 동일을 보며

캐롤과 사랑, 그리고 욕망

‘상대를 원하는 것’은 사랑이라기보단 욕망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나로 인해 상대가 더 좋은 삶을 살게 되길 바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에 캐롤은 테레즈를 사랑했다기보다는 욕망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자신과의 관계로 인해 테레즈가 다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테레즈에게 다가가고, 원하고, 함께 여행을 떠날 수 없었을 거다.

그렇지만 캐롤은 결국 테레즈를 사랑하게 됐다. 그래서 떠났다. 테레즈를 사랑하는 마음이 욕망하는 마음보다 커지지 않았더라면, 굳이 떠날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다. 자신의 사랑과 욕망을 동시에 잡겠다는 결심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언제나 그렇듯, 좋은 건 비싸다. 사랑만 하는 것도 어렵고, 욕망만 하는 것도 어렵지만, 사랑하면서 욕망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어렵다. 이 때 필요한 건 용기와 각오다. 캐롤은 앞으로 많은 것을 이겨내야 할 거다. 먹고사니즘부터 사회의 시선, 그리고 둘의 관계까지.

자기가 가치를 인정하는 대상에게 그에 걸맞는 값을 지불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볼 때마다 멋지다고 생각한다. 캐롤이 테레즈에게 돌아오는 모습은 정말 너무 멋졌다. 당당하게 원하는 모든 것을 거머쥐겠다는 패기는 참 보기 드문 덕목이다.

욕망을 나쁘다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그렇다고 욕망이 필요하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어쩌면 관계에서 욕망은 사랑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사랑받는 것 못지않게 누군가의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도 간절하게 원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사랑과 욕망은 하도 붙어다니는 경우가 많아서 종종 하나로 오인받지만, 엄밀히 말하면 다르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어쩌면 아닐지도 모르겠다. 제대로 사랑하려면 제대로 욕망할 줄 알아야 하고, 오래오래 잘 욕망하고 싶으면 꼭 사랑을 해야만 하는지도 모르겠다.


 

<캐롤> OST랑 <신세계> OST랑 되게 비슷하다. 특히 <캐롤>의 ‘The End’라는 곡와 <신세계>의 ‘Big Sleep’라는 곡.


 

테레즈와 테베즈.png

테레즈랑 테베즈는 이름이 비슷하다.

캐롤과 사랑, 그리고 욕망